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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 / 조지리처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
국내도서
저자 : 조지리처
출판 : 시유시 1999.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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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술은 사회로부터 독립적인 흐름에 따라 발전되며, 동시에 그 시대의 기술이 그 시대 사회의 모습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 에 아니다. 기술 이전에 사회가 있고, 사람이 있다. 혹시 어디선가 사회와 단절된 채 골방에서 기술에만 몰두하는 기술자가 존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 '혹시'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만든 기술이 사회에 영향을 미칠 확률은 극히 낮다. 그 확률은 단순히 운, 우연, 신의 계시와 같은 초자연적인 것이니 이 영역에서 논외로 할만하다. 기술은 사회와 함께 발전한다. 사회 이전에 기술은 존재할 수 없다.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사회에 적용되지 못한다면 사실 쓸모없다고도 볼 수 있다. 다만 내가 슬픈건, 왜 사회는 인간을 바보가 되도록 만들게 변하고 있으며 기술은 그것을 따를 수밖에 없냐는 것이다. 아마도 기술이 구현하고자 하는 사회가 부재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기술만으론 사회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지 몰라도 구현하고자 하는 사회가 존재한다면 기술은 충분히 사회를 이끌 수 있다고 본다. 그 사회에 맞는 기술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사회의 흐름에 명중할 것이라는 보장은 할 수 없다. 기술력에 보태 통찰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2.

전반적으로 긍정적이다. 다만 내가 그것을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는 기대를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만약 모든 선택의 과정에서 나의 주체성이 발휘되길 바란다면, 의견은 반대가 된다. 부정적을 넘어 비극적이되는 것이다. 인간을 바보로 만드는 기술 발전과, 내가 아닌 남의 필요에 의해 넘쳐나는 정보화는 우리의 주체성을 상실하도록 만든다. 사실, 책에서 언급된 것처럼 우리는 "맥도날드화된 사회에서 살아왔고 맥도날드화된 세계가 도래한 이후에 성장한 사람들"이므로 이 주체성의 상실을 "위협이 아니라 열반"으로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의 위험성을 조금이라도 깨달은 사람이라면 이것은 엄청난 위협이 된다. 하나만 예를 들어보자면, 나도 요즘 애용중인 'BEAT'(이하 비트)라는 앱이다. 이 앱은 최근 전세계적으로 대세인 라디오 스트리밍 어플리케이션의 한국 선두주자이다. 이 앱은 기술적으로 뛰어나다. 뿐만아니라 경제적으로도 효율적이다. 그러나 음악에 대한 나의 주체성을 생각하자면 너무나 비극적이다. 음악을 찾아듣는 적극성을 더 이상 발휘하지 않아도 나의 상황에 맞는(비 올 때, 휴식 할 때, 집중할 때 등) 음악을 틀어준다. 그것도 공짜로. 이 얼마나 효율적인가. 하지만 나는 이 앱을 사용하면서도 자꾸만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다. 이러다가 내가 나의 모든 음악적 주체성을 잃어버릴까 두렵기 때문이다. 직업에 있어서도 같다. 나의 주체성이 발휘되는 직업을 원한다면 부정적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위협이 아니라 열반'의 경지에 이를 것이니.


3.

서비스업의 확대는 분명 인간의 산업영역 확대에 도움을 줄 것이다. 그것을 단순히 효율성의 측면에서 본다면 말이다. 이에 따라 인간은 분명 더욱 노예화될 것이고, 사실 일부를 제외한 모두가 바보가 될 것이다. 이것은 사실 이미 많이 진행되었다.


4.

위에서도 언급했듯 나에겐 '주체성'이란 것이 너무나도 중요하다. 내가 하는 생각, 내가 하는 말, 내가 사용하는 언어,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음악, 내가 쓰는 글, 내가 만나는 사람... 등. 그렇지만 결국 나도 2015년 대한민국을 사는 현대인일 뿐이다. 비트 앱을 사용하며 음악적 주체성을 잃고, 영화 별점을 보며 영화의 선택적 주체성을 잃고, 맛집 정보를 보며 음식을 선택하는 주체성 또한 잃는다. 사실 내가 취향이라 부르는 것도, 다 나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이 나를 가장 두렵게 만드는 것이다. '나'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대부분의 사람도 나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양한 취향과 욕구를 지녔다 생각하지만, 사실 그것은 지극히 통제되고 제한되었다는 걸. 그걸 인정하는 사람과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만 있을 뿐이다. 우리의 취향과 욕구는 사회에 그다지 많은 영향을 미치지 않으니까.


5.

나는 지하철과 버스 기다리는 시간이 제일 싫다. 횡단보도 기다리는 시간도 싫다. 그래서 무단횡단도 자주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싫어서 지하철과 버스 어플을 달고 산다. 사실 1분 1초가 아까워서 저런 행동을 하는 건 아니다. 왜냐면 나의 시간의 효율성은 딱 '대중교통 대기시간'에만 한정되기 때문이다. 시간의 효율성을 나의 기준으로 삼는 사람이라면 하지 않을 비효율적인 행동들을 많이 한다. 아무 이유 없이 (굳이 이유를 대라면 날씨가 좋다?) 130번 버스를 타고 고려대학교에서 내려서 건국대학교까지 장장 4시간을 걸어가는 일이라든지, 라디오 스트리밍 시대에 중고로 2만 원짜리 시디플레이어를 산다든지, 모바일 지도에 나와 있다 하더라도 직접 걸어가 보지 않으면 그 길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든지 하는 등 남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상한 비효율을 많이 범한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잘 모르겠다. 사실 나는 '지하철이나 버스 기다리기'를 제외하곤 거의 효율성을 추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정말 그럴까. 다른 학우들의 의견을 들으면 사실 나도 엄청나게 효율성을 추구하는 인간이라는 걸 깨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 나는 이상한 비효율을 범하는 사람이다.


6.

뭐, 너무나 많지 않은가? 경제적, 시간적으로 효율적이기 때문에 라디오 스트리밍 앱을 이용하고, 또한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른 책들을 읽거나 사고, 굳이 구석 동네 서점을 찾아가기보단 모든 게 다 있는 대형서점, 그도 못가 인터넷 서점을 이용하고... 모든 것이 효율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이다. 우리는 이것으로 우리가 원하는 바를 빠른 시간에, 싼 가격에, '합리적으로' 얻을 수 있다. 당연히 긍정적 효과다. 잃는 것이라면... 중고 시디플레이어로 음악을 듣는 맛을 평생 모르거나, 아무 이유 없이 땡볕에서 4시간동안 걸으며 마주치는 풍경과 사람들을 평생 모를 것이고, 길 건너에 이런 빵집이 있다는 것을 버스만, 자동차만 타고 다니면 모를 것이다. 효율성과 거리가 머니, 이것은 다른 시대(자본주의가 아닌?)가 도래하지 않는 한 '잃는다'고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7.

사람들이 효율성을 추구해서 세상이 변했다? 반대인 것 같다. 세상이 변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효율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은 그만큼 주체적이지 않다. 그리고 주체적이기도 힘들다. 엄청난 삶의 고단함을 이긴 사람만이 주체성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주체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대부분 착각이거나 환상이다. 단언할 수 있다. 나 또한 그렇기 때문이다. 많은 역사를 거치며 (결코 누구 한명의 힘은 아니었다.) 세상은 변했고, 그것이 자본주의든 신자유주의든(잘 모르겠지만). 그것에 맞춰 사람들은 살아갈 뿐이다. 그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효율적으로 사는 것이니까. 그래서 남들만큼 경제력을 쌓고, 남들만큼 시간을 쓰고, 남들만큼 노력하면서 사는 것이 가장 효율적으로 사는 삶일 테니까. 맞춰 사는 것이다. 


8.

“특히 맥도날드화된 사회에서 살아왔고 맥도날드화된 세계가 도래한 이후에 성장한 사람들이 가질 만한 입장이다. 그들이 알고 있는 유일한 세계인 맥도날드화된 사회는 좋은 맛과 높은 질에 대한 기준을 대표한다. 그들은 많은 선택사항이 주어진 질서정연한 세계를 선호하며, 점점 더 합리화되고 있는 지금보다 더 나은 세계가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다. 그들은 삶의 많은 측면에 존재하는 예측가능성을 좋아한다. 그들은 인간 로봇 및 심지어 무인 로봇과 상호 작용하는 비인격적인 세계를 즐긴다. 그들은 적어도 그들 세계의 맥도날드화된 부분에서만큼은 되도록 긴밀한 인간적 접촉을 피하려고 한다. 점차 인구의 많은 부분을 차지할 이런 사람들에게 맥도날드화는 위협이 아니라 열반이다.”

(p.313-314) 

  앞에서 맥도날드화를 인공지능 슈퍼컴퓨터화로 바꾸면 될 것 같다. 맥도날드가 되었든, 인공지능 컴퓨터가 되었든 무언가가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맥도날드화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엄청난 고단함을 이겨내지 않고서는 벗어나기 힘들다. 각자가 벗어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면 칠수록 더 빠지는 깊은 늪일 뿐이다. 그래서 SF공상과학 영화는 끔찍하게 사실적이다. 미래의 그 모습은 그저 맥도날드가 컴퓨터로 바뀐 것뿐일 테니까. 미래는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다. 그 사실(이 세계는 인공지능화 되어있고 그것만 있다는. 끔찍하지만 너무나 자명한 그 사실.)이 존재하는 한 누군가에겐 삶이 위협일 것이고 누군가에겐 삶이 열반의 경지일 것일 테니.


8.

감정노동자가 대표적으로 꼽히지만, 책에서도 보듯 대부분의 서비스업에서 노동의 비인간화는 진행중이다. 비인간화된 노동의 장점이라면, 주구장창 위에서 이야기한 효율성이겠다. 하지만 이런 효율성을 장점이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뒷목이 뻐근해진다. 최근 읽고 있는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 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비인간화된 노동. 결국 그것은 아우슈비츠에서의 효율적인 학살의 효율성과 다를 바가 없다. 함부로 효율성, 을 논해선 안 된다. 비인간화된 노예가 증가하면 또 다른 아우슈비츠가 발생한다. 다시 인간들은 서로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을 것이고, 모두가 고통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9.

Q. 맥도날드화는 더 적은비용으로 최대의 효율을 얻기 위한 현대 기업의 태도로부터 출발하게 됐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이 맥도날드화된 사회에 적응하고 살고 있고, 맥도날드화되지 않은 사람들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곤 합니다. 맥도날드화는 유토피아에 대한 근접인가요? 혹은 디스토피아를 향한 점진적인 침식과정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지극히 내 입장에서 봤을 때, 엄청난 디스토피아를 향한 침식이다. 갑자기 이런 말을 하면 모두가 당황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스무 살 때 처음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사먹어 보았다. 그 전까지는 학교에서 간식으로 햄버거를 줘도 먹지 않았다. (친구를 주거나, 집에 가져와서 가족들을 줬다. 가끔 몰래 버리기도 했다.) 햄버거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 특유의 소스 맛이 싫었다. 하지만 대학교에 오면서 빨리 밥을 해결해야하거나 혼자 밥을 먹어야 하는 경우, 어쩔 수 없이 햄버거를 먹어야만 했고, 그러면서 나는 20년 동안 유보해왔던 맥도날드화의 길에 들어섰다. 그래도 다행인건 다른 또래 친구들보다 10년, 아니면 그보다 더 늦게 맥도날드화의 길에 들어섰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그들보다는 조금 더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고, 효율성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있었다. (고 말하는 것은 엄청난 억측이겠지만.) 물론 그저 나의 생득적인 욕구, 일지도 모른다. 효율성의 노예를 벗어나 끝없이 가볍고 자유로운 것을 추구한다는 것이 말이다. 하지만 생득적인 욕구라 보기엔, 우리는 사회의 영향을 너무나 많이 받고 있지 않은가. 어쨌든 갑자기 내가 이런 고백 아닌 고백을 하게 된 건, 나에게 있어 ‘맥도날드화된’ 이 세계가 그만큼 낯설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이다. 누가 볼 땐 세상 물정 모른다, 라고 할 수도 있고 지나치게 순수한 것일 수도 있지만. 정말로 나는 극도로 ‘맥도날드화된’ 이 세계가 여전히 너무나도 낯설다. 어디엔가 이와 다른 유토피아가(모두가 주체적인 선택을 하고 그러고도 그 다음을 고단하게 견뎌내지 않아도 되는, 그런 곳. 효율성을 생각하지 않아도 나의 선택을 내가 할 수 있는 그런 곳.) 당연히 존재할 것이라 믿고 있었기에 말이다. 물론 이 믿음은 지금도 나를 지탱하는 힘이다. 이 책의 마지막에 언급된 ‘맥도날드화된’ 세상에 대한 투쟁. 그 투쟁을 나는 지금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너무나도 고단하고 괴롭다. 금방이라도 포기하고 효율성의 늪으로 깊숙이 빠져들고만 싶다. 이 사회의 모든 것은 이미 맥도날드화 되었다고 본다. 여기서 내가 선택해야 할 것은 투쟁을 계속할 것인지, 늪에 빠져들 것인지 둘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