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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국내도서
저자 :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 / 이재룡역
출판 : 민음사 2011.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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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의도

여러 우연이 겹쳐 이 책을 읽게 되었고 함께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는 숨겨진 의도를 말하지만, 나는 우연과 운명을 말했다. 모든 일에 사실 별 의미는 없었다. 그저 그래야만 했고, 그저 쓰여져 있던 것일 뿐. 나는 이 토론을 통해 어떤 의미를 탐구하거나 발견하려는 시도보다 그저 이미 쓰인 이 소설의 상상력 그 자체로써 지니는 가치를 함께 나누고 싶다.

 

1

사비나와 토마시, 그리고 프란츠와 테레자

                     : 가벼움과 무거움

- 책에 대한 간단한 소감

- 사비나/토마시/프란츠/테레자 중 가장 감정이입 한/하지 못한 인물

- 관계의 가벼움과 무거움을 가장 명확히 보여주는 인물들

 

()-사비나-

사비나에게 산다는 것은 보는 것을 의미한다. 시야는 두 경계선에 의해 제한된다. 눈이 멀 정도로 강렬한 빛과 완전한 어둠, 아마도 모든 극단주의에 대한 그녀의 혐오감은 이런 데서 연유할 것이다. 극단적인 것은 그것을 넘어서면 생명이 끝나는 경계선의 표시이며, 정치와 마찬가지로 예술에 있어서 극단주의에 대한 열정은 죽음에 대한 위장된 욕망이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160p

 

프란츠는 이혼을 할 것이고, 그녀가 커다란 부부 침대에서 그의 옆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가까이에서나 멀리에서나 모든 사람이 바라볼 것이다. 그녀는 모든 사람 앞에서 연극을 해야만 할 것이다. 사비나가 되는 대신 억지로 사비나 역을 연기해야만 하고 그 연기법을 찾아야만 할 것이다. 공개적으로 변한 사랑은 무게를 더할 것이고 짐으로 변할 것이다. 생각만 해도 벌써부터 허리가 휘었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191p

 

그날 밤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흥분한 그녀는 그 어느때보다도 격렬하게 그를 사랑했다. 그녀는 그를 사랑했고 동시에 이미 그곳에서 먼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또다시 멀리에서 배반의 황금 나팔 소리가 들렸고, 그녀는 이 부름에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녀 앞에 아직도 광활한 자유의 공간이 열려 있으며 그 공간의 넓이가 그녀를 흥분시키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도 프란츠를 미친 듯 거칠게 사랑했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193p

 

한 인생의 드라마는 무거움의 은유로 표현될 수 있다. 사람들은 우리 어깨에 짐이 얹혔다고 말한다. 이 짐을 지고 견디거나, 또는 견디지 못하고 이것과 더불어 싸우다가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한다. 그런데 사비나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무 일도 없었다. 그녀는 한 남자로부터 떠나고 싶었기 때문에 떠났다. 그 후 그 남자가 그녀를 따라왔던가? 그가 복수를 꾀했던가? 아니다. 그녀의 드라마는 무거움의 드라마가 아니라 가벼움의 드라마였다. 그녀를 짓눌렀던 것은 짐이 아니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었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201p

 

그래서 그녀는 시신을 화장하고 재를 뿌려달라고 명시한 유언장을 작성했다. 테레자와 토마시는 무거움의 분위기 속에서 죽었다. 그녀는 가벼움의 분위기에서 죽고 싶었다. 그 가벼움은 공기보다도 가벼울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에 따른다면 부정적인 것이 긍정적인 것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445p

 

()-토마시-

그는 테레자에게 얽매여 칠 년을 살았고, 그녀는 그의 발길 하나하나를 감시했다. 마치 그의 발목에 방울을 채워 놓은 것 같았다. 이제 그의 발걸음은 갑자기 훨씬 가벼워졌다. 거의 날아갈 듯 했다. 그는 파르메니데스의 마술적 공간 속에 들어간 것이다. 그는 존재의 달콤한 가벼움을 만끽했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54p

 

100만분의 1의 상이성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은 오로지 섹스에서뿐이다. 왜냐하면 섹스란 공개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정복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세기 전만해도 이런 유의 정복에는 많은 시간(수주일 심지어는 몇달까지!)이 요구되었고, 정복된 것의 가치는 정복하기 위해 쏟아 부은 시간으로 가늠되었다. 심지어 정복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엄청나게 짧아진 오늘날에도 섹스는 여전히 여성적 자아의 신비가 숨어 있는 금고처럼 보인다.

따라서 그를 여자 사냥에 내모는 것은 관능의 욕구(관능은 말하자면 덤으로 따라오는 것이다.)가 아니라 세계를 정복(지상에 머무는 육체를 메스로 개봉하고자 하는)하려는 욕망이었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323p

 

그의 가슴이 찢어졌다. 심장마비가 오는 것 같았다.

테레자는 다시 잠들었지만, 그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는 죽은 그녀 모습을 상상했다. 그녀는 죽었고 끔찍한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죽었기 때문에 그녀를 깨울 수 없었다. 그렇다, 죽음이란 이런 것이다. 자고 있는 테레자가 끔찍한 가위에 눌렸는데, 그는 그녀를 깨울 수 없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367p

 

()-프란츠-

나에게는 이 설명밖에 없다. 그에게 있어서 사랑은 공적인 삶의 연장이 아니라 그 대척점이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선의와 자비에 자신을 내던지고 싶다는 욕구였다. 마치 포로가 되려면 먼저 자신의 모든 무기를 내던져야 하는 군인처럼 타인에게 자신을 방기하고자 하는 욕구, 그리고 아무런 방어 수단이 없는 상태에서 그는 언제 공격당할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나는 프란츠의 사랑이란 언제 공격이 올지 끊임없이 기다리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143p

 

하긴 그는 항상 현실보다 비현실을 선호했던 터였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강의하는 교탁 뒤보다는 데모 대열(이미 내가 말했듯 그것은 하나의 광경, 하나의 꿈에 불과한 것이다.) 속에 있을 때 마음이 더 편했던 것처럼, 그녀와 함께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그들 사랑을 위해 매번 가슴 조이던 때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여신으로 변모한 사비나와 함께 있을 때가 더 행복했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199p

 

그가 사비나에게 바치는 숭배는 사랑이라기보단 종교에 가까웠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207p

 

()-테레자-

그녀는 세상일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며 매사를 비극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육체적 사랑의 가벼움과 유쾌한 허망함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가벼움을 배우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는 시대착오적인 사고로부터 벗어나는 법을 배우고 싶었던 것이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232p

 

욕조 가장자리에 앉은 그녀는 죽어 가는 까마귀로부터 눈길을 뗄 수 없었다. 그의 고독에서 자기 운명의 표상을 본 그녀는 혼자 중얼거렸다. 이 세상에 내게는 토마시밖에 없어.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262p

 

그녀는 오늘따라 유난히 쓸쓸하고 우울해 보이는 강물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강 한가운데에서 이상한 물체, 붉은 물체를 발견했다. 그렇다. 벤치였다. 프라하 공원에 무수히 널린 철재 다리 나무 벤치였다. 그것은 천천히 블타바 강 중심부를 따라 떠내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다른 벤치가 따랐다. 그리고 또 다른 벤치, 테레자는 마침내 프라하 공원의 벤치가 도시를 빠져나와 물에 떠다니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점점 늘어나는 벤치는 마치 물길에 휩쓸려 숲에서 떠내려 온 가을 잎처럼 물 위를 떠다녔고, 그 벤치들 중엔 빨간색도 있고 노란색도 있고 파란색도 있었다.

그녀는 다시 물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한히 슬펴졌다. 그녀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이별이라는 것을 알았다. 여러 색깔을 거느리며 사라지는 인생에 대한 작별.

벤치가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최후까지 늑장을 부리는 몇몇 벤치가 여전히 보였고, 곧이어 노란 벤치 하나, 조금 후 또 하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푸른 벤치 하나가 나타났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281-282p

 

 

Einmal ist Keinmal. : 한 번은 중요치 않다.

- 니체의 영원회귀.

     : 책에서 나타나는 선택의 반복

     : 토마시의 물음으로부터 나의 삶 변호하기

 

()

Einmal ist Keinmal. 한번은 중요하지 않다. 한 번이면 그것으로 영원히 끝이다. 유럽 역사와 마찬가지로 보헤미아 역사도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보헤미아 역사와 유럽 역사는 인류의 치명적 체험 부재가 그려 낸 두 밑그림이다. 역사란 개인의 삶만큼이나 가벼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358p

 

()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이 우스꽝스러운 신화가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

뒤집어 생각해보면 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란함조차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9p

 

()

그리고 다시 한 번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생각이 그의 머리에 떠올랐다.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뿐이며,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딱 한번만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과연 어떤 것이 좋은 결정이고 어떤 것이 나쁜 결정인지 결코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여러 가지 결정을 비교할 수 있도록 두 번째, 세 번째, 혹은 네 번째 인생이 우리에게 주어지진 않는다.

역사도 개인의 삶과 마찬가지다. 체코인들에게 역사는 하나뿐이다. 토마시의 인생처럼 그 역시 두 번째 수정 기회 없이 어느 날 완료될 것이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357p

 

()

확실히 니체는 영원회귀 관념에 어떤 경악스럽고 숨막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그는 그 관념을 그의 강함, 곧 있는 그대로의 삶을 '긍정하는' 능력의 시금석으로 사용했다.

프레드릭 코플스턴, <18-19세기 독일철학-피히테에서 니체까지>, 서광사, 671p

 

왜 니체가 영원회귀의 이론을 강조하느냐고 하는 주된 이유의 하나는, 그에게는 그것이 그의 철학 안에 있는 빈틈을 메우는 것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생성의 흐름에 존재의 외관을 준다. 더욱이 그것은 우주를 초월하는 어떤 존재도 끌어들이지 않고 그렇게 한다. 나아가 그 이론은 한쪽에서는 초월적 창조신의 관념을 끌어들이는 것을 피하는 동시에, 다른 한쪽으로는 우주라는 이름 아래 신의 관념을 은연중에 다시 끌어들이는 범신론도 피한다. 니체에 따르면, 우주는 새 형태를 끊임없이 창조하면서 자기 자신을 되풀이한다고 하면, 그것은 신에의 열망을 배반한다. 그 경우 우주 자신은 창조신의 개념에 융합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융합은 영원회귀의 이론에 의하여 배제되어 있다.

다시 말하자면, 영원회귀의 이론은 이승에 대한 니체의 단호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우주는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가둬 놓고 있다. 우주의 의미는 순수히 내재적이다. 그리고 참으로 강한 인간, 참으로 디오니소스적인 인간은 약함의 징표인 현실도피를 멀리하면서, 확고하게 용기를 가지고 또한 기쁨마저 느끼면서 이 우주를 긍정할 것이다.

때때로 영원회귀의 이론과 초인의 이론은 모순된다고 말해진다. 그러나 두 설이 논리적으로 모순된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원환적 회귀의 이론은 초인에의 의지의, 또는 그 점에 관해서는, 초인 자신의 의지의 회귀를 배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영원회귀의 이론은 되풀이되지 않는 창조적 과정이 궁극 목적으로서의 초인이라고 하는 개념을 배제한다는 것은 옳다. 그러나 니체는 이러한 개념을 승인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반대로 그는 우주를 해석하는 신학적 양식을 은연중에 다시 들여오는 것과 같다고 그것을 배제하고 있는 것이다.

프레드릭 코플스턴, <18-19세기 독일철학-피히테에서 니체까지>, 서광사, 673-674p

 

()

위버멘쉬는 항상 자기 자신을 극복하는 신체적 존재이며, 인간 자신과 세계를 긍정할 수 있는 존재이자, 지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를 완성시키는 주인의 역할을 하는 존재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위버멘쉬 개념은 힘에의 의지와 허무주의 그리고 영원회귀 사유와의 정합적 구도를 완성시키는 매개개념으로 사용된다.

위버멘쉬는 영원회귀의 사유로 인해 고통스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결단에 의해 환하게 웃는 자로 변화된 사람이다. 인간의 힘의식이 이렇게 상승되면 그는 영원회귀 사유가 초래할 수 있는 고통과 분열, 몰락의 길로 들어서지 않고 그 반대의 가능성인 위버멘쉬로 될 수 있다. 자신을 위버멘쉬로서 인식하는 새로운 자의식에 의해 인간은, 영원회귀 사유를 자신의 몰락가능성을 배제하면서 견딜 수 있으며, 이때 영원회귀 사유는 이 인간에게 긍정적인 기능을 한다.

그렇다면 차라투스트라는 어떤 이유에서 영원회귀 사유가 인간에게 고통을 유발시킨다고 하는 것인가? 영원회귀 사유는 인간에게 허무적 경험을 유발시킬 수 있는 아주 위험한 성격을 지닌 사유이기 때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위버멘쉬 [Übermensch, overman],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

어느 날 낮 또는 어느 날 밤 그대가 가장 쓸쓸한 고독 속에 잠겨 있을 때 악마가 그대 뒤로 슬며시 다가와 이렇게 말한다면 어떨까. "네가 지금 살고 있고, 살아왔던 이 삶을 너는 다시 그리고 또다시 살아야 할 것이다. 무수히 반복해서. 거기에 새로운 것은 전혀 없으며, 모든 고통, 모든 기쁨(네 삶의)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이 틀림없이 네게로 찾아올 것이다. 똑같은 차례와 순서로.“

니체, 즐거운 학문 메시나에서의 전원시 유고

 

()

그는 한없이 자책하다가 결국 자기가 진정으로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무엇을 희구해야만 하는가를 안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사람은 한 번 밖에 살지 못하고 전생과 현생을 비교할 수도 없으며 현생과 비교하여 후생을 바로잡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테레자와 함께 사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혼자 사는 것이 나을까?

도무지 비교할 길이 없으니 어느 쪽 결정이 좋을지 확인할 길도 없다. 모든 것이 일순간, 난생 처음으로, 준비도 없이 닥친 것이다. 마치 한 번도 리허설을 하지 않고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그런데 인생의 첫 번째 리허설이 인생 그 자체라면 인생에는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기에 삶은 항상 밑그림같은 것이다. 그런데 밑그림이라는 용어도 정확하지 않은 것이, 밑그림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한 초안, 한 작품의 준비 작업인데 비해, 우리 인생이라는 밑그림은 완성작 없는 초안, 무용한 밑그림이다.

토마시는 독일 속담을 되뇌었다. einmal ist keinmal. 한 번은 중요치 않다.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17p

()

얼마 후 그는 다시 이런 생각을 했고, 나는 앞 장의 뜻을 밝히기 위해 이를 언급하고자 한다. 우주 어디엔가 우리가 두 번째 태어나는 행성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또한 지구에서 보낸 전생과 거기에서 익힌 경험을 완벽하게 기억한다고 해 보자. 그리고 이미 두 번의 전생 체험을 가지고 세 번째로 태어나는 또 다른 행성이 존재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인류가 매번 더욱 성숙하면서 다시 태어나는 다른 행성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영원 회귀에 대한 토마시의 생각이다. 지구(1번 행성, 미체험 행성)에 사는 우리는 당연히 다른 행성에서 인간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서는 막연한 개념밖에 지닐 수 없다. 인간이 더 현명해질까? 인간이 완숙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반복함으로써 이에 도달할 수 있을까?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359p

 

()

이 소설의 중심 주제는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다. 쿤데라는 이 복합적인 주제를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을 구분하는 파르메니데스와 영원 회귀의 유토피아를 생각해 낸 니체로부터 이끌어 낸다. 삶의 회귀와 반복의 가능성은 책임의 엄청난 부담을 인간 존재에게 짐 지울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삶의 비반복성은 아찔한 가벼움을 인간 존재에게 부여한다. 우리의 이성은 회귀(다른 사람이 되어 이 세상으로 오는)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구에서 펼쳐지는 우리 삶은 일회적이며 최종적이다. 우리 삶은 반복 가능성을 배제하고, 그렇기 때문에 실수를 만회할 가능성 역시 없는 것이다. 자연의 존재와 인간 현존 간의 근본적인 차이 현대현상 철학의 가장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다. 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해는 뜨고 진다. 계절은 때에 따라 바뀐다. 바닷가에서는 한 치도 어김없이 밀물과 썰물이 들고 난다. 유일하게 인간만이 자신의 인생길을 단 한 차례만 밟고 지나간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이 잘못했던 것을 회수할 수도, 수정할 수도 없다. 자연과 달리 인간은 영장의 선물, 즉 의식, 사고로 무장되어 있다. 인간은 자기 실존의 유한성을 어찌할 수 없다. 그의 자의식은 자신의 유한성의 의식인 동시에 죽음의 불가피성의 의식이다. 자아는 자신의 현존을, 그러나 동시에 탄생과 죽음으로 경계 지어진 자기 행로의 비극적 제약성 또한 잘 안다.

가까이 있는, 사랑하는 존재와 맺은 관계에서 알게 된 이러한 의식은 고통스러운 형태를 취한다. 악마에게 우리 자신의 영혼을 팔아넘긴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의 위험으로부터 결코 떼어 놓을 수 없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연인들이 서로 이야기했던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만 있다면 우리들이 사랑하면서 저지른 수많은 실수 가운데 대부분은 피할 수 있을 텐데라고. 하지만 너무 늦었다. 회귀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에……를 입에 담는 것은 믿을 수 없는 바람이다. 다른 결정을 했더라면 모든 것이 잘 되었을 텐데, 시간을 되돌려 놓기만 한다면 사태의 흐름을 되돌려 놓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바람은 희망 사항에 불과하다.

다시금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거나 지나간 잘못을 되돌려 놓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행위의 결과에 대한 경험이 풍부해진 뒤에 결정하게 되면 훨씬 이성적이고 훨씬 지혜롭게 결정할 것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쿤데라는 니체의 영원 회귀의 유토피아뿐만 아니라 인생은 실험실 이 실험실에서 인간은 자신의 가능성을 최대로 실현할 수 있는 실존이 어떤 형태인가를 철저하게 시험해 볼 수 있다. 이라는 무질의 생각마저도 논박한다.

 

세계를 실험실에 비교하는 것은 그에게 이제 옛 생각을 다시금 일깨웠다. 인간으로 존재하는 최상의 형식을 철저하게 시험하고 새롭게 발견해야 하는 위대한 실험실이 인생이라고 그는 전에 종종 생각했다.

무질, 특성 없는 남자

 

크베토슬라프 흐바틱,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미체험 행성>

   

3

소설의 형식 

- 밀란 쿤데라의 소설관을 통해 본 서술방식

 

()

나는 수년 전부터 토마시를 생각했다. 그러나 그를 처음으로 분명하게 보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사유의 밝은 빛 덕분이었다. 안마당 건너편 건물 벽에 시선을 고정하고 아파트 창가에 서 있던 그를 나는 보았다. 그는 어찌 해야 할지 모르는 채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14p

 

그리고 나는 다시 한 번 이 소설 첫머리에서 내게 드러났던 그의 모습을 본다. 그는 창가에 서서 건너편 건물 벽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이 이미지에서 탄생했다. 이미 말했듯 소설 인물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처럼 어머니의 육체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의 상황, 하나의 문장, 그리고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거나, 본질적인 것은 여전히 언급되지 않았지만 근본적이며 인간적 가능성의 씨앗을 품고 있는 은유에서 태어난다.

그러나 작가란 자기 자신 이외의 것은 말할 수 없다고들 하지 않는가?

()

나도 직접 이런 상황을 겪어 보았다. 그러나 내 이력서 속 자아로부터 그 어떤 인물도 도출되지 않았다. 내 소설의 인물들은 실현되지 않은 나 자신의 가능성들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그들 모두를 사랑하며 동시에 그 모두가 한결같이 나를 두렵게 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내가 우회하기만 했던 경계선을 뛰어넘었다. 나는 바로 이 경계선(그 경계선을 넘어가면 나의 자아가 끝난다.)에 매혹을 느낀다. 그리고 오로지 경계선 저편에서만 소설이 의문을 제기하는 신비가 시작된다. 소설은 작가의 고백이 아니라 함정으로 변한 이 세계에서 인간 삶을 찾아 탐사하는 것이다. , 이제 그만하자. 토마시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355p

 

토마시는 카레닌이 누워 있는 방으로 살금살금 들어갔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카레닌과 함께 있는 것을 원치 않았다. 두 사람은 각각 한쪽에서 개를 내려다보았다. 이 공통된 행동은 화해의 몸짓이 아니었다. 정반대였다. 각기 홀로 있는 셈이었다. 테레자가 자신의 개와 함께 있고, 토마시도 자기 개와 함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이렇게 각각 떨어져서 혼자 있지 않을까 무척 두려웠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478p

 

()

저주와 특권이 더도 덜도 아닌 같은 것이라면 고상한 것과 천한 것 사이의 차이점은 없어질 테고, 신의 아들이 똥 때문에 심판받는다면 인간 존재는 그 의미를 잃고 참을 수 없는 가벼움 그 자체가 될 것이다. 스탈린의 아들이 고압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에 몸을 던진 것은 의미가 사라진 세계의 무한한 가벼움 때문에 한심하게 치솟은 천칭 접시 위에 자기 몸을 올려놓기 위해서였다.

스탈린의 아들은 똥을 위해 목숨을 내놓았다. 그러나 똥을 위해 죽는 것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제국 영토를 보다 동쪽으로 넓히기 위해 생명을 바친 독일인들이나 조국 세력을 보다 먼 서쪽까지 뻗어 나가게 하기 위해 죽은 러시아인들. 그렇다, 이들은 멍청한 짓을 위해 죽었고, 그들의 죽음은 의미도 없고 보편적 결과도 낳지 못했다. 반면 스탈린 아들의 죽음은 전쟁의 광범위한 바보짓 중 유일한 형이상학적 죽음이었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392-393p

 

그러므로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가 미학적 이상으로 삼는 세계는, 똥이 부정되고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각자가 처신하는 세계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러한 미학적 이상은 키치라고 불린다.

(...)

키치는 자신의 시야에서 인간 존재가 지닌 것 중 본질적으로 수락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배제한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399p

 

키치는 거짓말로 인식되는 순간, -키치의 맥락에 자리 잡는다. 권위를 상실한 키치는 모든 인간의 약점처럼 감동적인 것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 중 그 누구도 초인이 아니며 키치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키치는 경멸해도 키치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이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415p

 

()

쿤데라 :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예술형식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거든요. 예를 들어 아래와 같은 것들을 포함해서요.

1. 비본질적인 부분을 완전히 제거하기(현대사회에서 구조적인 명증성을 잃지 않고도 실존의 복잡함을 잡아내기 위하여)

2. '소설적 대위법' (철학,서사,꿈을 하나의 음악으로 엮어내기)

3. 독특하게 소설적인 에세이(당연한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주장하기보다는 가설적이고 장난스럽고 아이러니한 특성을 간직하는)

 

살몽 : 대위법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는 덜 두드러지더군요.

쿤데라 : 바로 그 점이 제가 목표한 것이었지요. , 서사, 성찰이 서로 분리될 수 없고 완전히 자연스러운 흐름이 되어 함께 흐르기를 바랐거든요. 하지만 소설의 다성적인 특징은 6장에서 뚜렷하게 드러나요. 스탈린 아들의 이야기, 신학적 성찰, 아시아의 정치적 사건, 방콕에서의 프란츠의 죽음, 보헤미아에서의 토마시의 장례식이 모두 '키치란 무엇인가?'라는 영원한 질문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거든요. 이 다성적인 구절이 소설이 전체 구조를 지탱하는 기둥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건축 비결이거든요.

 

처음부터 저는 이 성찰들을 장난스럽고 아이러니하고 도발적이고 실험적이고 질문하는 어조로 쓰려고 의도했습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제 6장인 대장정은 키치에 대한 에세이인데 하나의 주요 주제인 키치를 탐구합니다. 키치란 똥의 존재를 절대적으로 부정하는 것이지요. 키치에 대한 성찰은 저에게는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 주제는 상당한 생각과 경험, 연구, 열정에 바탕을 둔 것이지요. 하지만 어조 자체는 한 번도 진지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도발적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이 에세이는 소설과 떨어져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순전히 소설적인 성찰이지요.

크리스티앙 살몽, <작가란 무엇인가 : 피할 수 없는 형식적인 원형, 밀란 쿤데라>, 다른, 295p-29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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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데라의 소설 문법은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소설가들 이들 작가들은 자신들의 전언을 사건과 등장 인물 속에 감춘다. 그리고 그 전언에 상징과 은유와 알레고리라는 옷을 입힌다. 그들은 이런 방식으로 언어를 부린다. 의 문체와는 확연히 다르다. 쿤데라의 언어, 쿤데라만의 독특한 이야기 전개 방식, 쿤데라의 지적인 문체는 분명한 의미 전달만을 문제 삼는 현대의 문장론을 파괴 문학 텍스트의 다의성과 단의성 간의 긴장이 손상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하려고 나섰다. 쿤데라 소설의 화자는, 그가 어떤 이야기꾼의 탈을 쓰고 (소설의 시작과 함께, 또는 소설이 어느 정도 진행된 다음에) 등장하든 간에, 이성적인 논평과 성찰을 하며 사건 진행 속으로 몸소 뛰어들고, 자기가 한 이야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야기를 이해하도록 핵심을 드러내며 독자들을 상대로 이야기를 해설한다. 그러나 이야기에 곁들인 화자의 이 해설보다는 이야기 그 자체의 맛이 훨씬 더 독창적이고, 맛도 풍부하고, 훨씬 더 깊이 있다. 쿤데라의 논평은 독자들의 회의를 무효화한다. 수많은 여자들과 관계를 맺는 토마시의 난봉꾼기질, 또는 토마시에 대한 테레자의 낭만적인 성격이 그 좋은 예다. 소설을 읽어 가면 텍스트 스스로가 작가의 의도 이 의도는 소설 곳곳에서 마주치는 화자의 성찰을 통하여 획득된다. 를 서서히 노출한다. 결국 독자는 토마시와 테레자에 관한 나름대로의 생각 이 생각은 새로운 차원의 정신 활동이며, 작가가 작품 속에서 펼치는 제한된 해설 이상의, 훨씬 더 많은 것을 훨씬 더 다양하게 보게 만든다. 에 도달하게 된다.

작가의 의도를 뛰어넘도록 하는 소설의 미덕 이 미덕을 쿤데라는 톨스토이가 창조해 낸 안나 카레니나의 문학적인 성격(안나 카레니나는 소설이 진행됨에 따라 도덕적인 판단 대상이 아니라, 사랑하는 여인의 처절하게비극적인, 따라서 독자들의 심금과 연민을 일깨우는 형상으로 바뀐다.)을 예로 들면서 언급했다. 은 새로운 관점에서 토마시와 테레자를 보도록 유도한다. 해설자로 등장하는 쿤데라는 소설과 거리를 유지하며 조롱기 어린 목소리와 비판적 회의를 거침없이 토해 낸다. 이를 극복하게 만드는 것은 소설의 미덕이다. 뿐만 아니라 소설 주인공들을 피가 통하는 인물로 부각하고, 종전 이후 유럽 문학에 등장한 가장 매력적인 연인들 가운데 한 쌍으로 각인하는 것 역시 이 미덕의 공로다.

크베토슬라프 흐바틱,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미체험 행성>

 

Es muss sein! : 그래야만 한다.

- 토마시의 우연과 필연의 인식 변화

- 운명을 믿으며 살아가는 것 

  / 모든 일은 우연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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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상점 주인이 불쑥 말했다.

"마크툽."

"그게 무슨 말이죠?"

"자네가 아랍인으로 태어났어야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지."

상점 주인이 대답했다.

"굳이 번역하자면 '기록되어 있다'는 뜻이지."

상점 주인은 담뱃불을 끄면서 산티아고에게 크리스털 잔에 차를 담아 손님들에게 팔아도 좋다고 했다.

때로는 인생의 강물을 저지하는 것이 불가능할 때도 있다.

파울로 코엘료, <연금술사>, 문학동네, 10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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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메니데스와는 달리 베토벤은 무거움을 뭔가 긍정적인 것이라고 간주했던 것 같다. "Der schwer gefasste Entshluss." 진중하게 내린 결정은 운명의 목소리와 결부되었다. ("es muss sein!") 무거움, 필연성 그리고 가치는 내면적으로 연결된 세 개념이다. 필연적인 것만이 진중한 것이고, 묵직한 것만이 가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념은 베토벤의 음악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그 책임을 작곡가 자신보다는 베토벤의 해설가에게 돌리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아니면 그럴 만한 개연성이 있겠지만) 우리는 오늘날 이런 신념에 어느 정도 동조한다. 우리 생각에는 인간을 위대하게 하는 것은, 아틀라스가 어깨에 하늘을 지고 있듯 인간도 자신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베토벤의 영웅은 형이상학적인 무게를 들어올리는 역도 선수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6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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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떤 한 사건이 보다 많은 우연에 얽혀 있다면 그 사건에는 그만큼 중요하고 많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우연만이 우리에게 어떤 계시로 나타날 수 있다. 필연에 의해 발생하는 것, 기다려 왔던 것, 매일 반복되는 것은 그저 침묵하는 그 무엇일 따름이다. 오로지 우연만이 웅변적이다. 집시들이 커피 잔 바닥에서 커피 가루 형상을 통해 의미를 읽듯이, 우리는 우연의 의미를 해독하려고 애쓴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8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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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늘 우연이란, 지배해야 마땅한 어떤 영토 같은 것으로 배워왔다. 그것이 근대소설이 갖춰야 할 가장 필수적인 기본기라는 가르침도 받았다. 이전 소설들이 우연으로 사건이 해결되는 반면, 근대소설은 우연으로 시작해 필연으로 끝나는 장르라고. 그게 바로 논리라고. 그래서 우리는 소설을 쓰기 전 철저하게 설계도 먼저 그려야 한다는 말도 들었다. 공학적으로, 나사못 하나 허투루 박지 말고, 꼼꼼하게. 제목도 마찬가지로.

그러나 나는 그 논리가 버거워, 종종 우연으로 소설을 끝내버리곤 했다. 며칠 밤을 지새우며 내적 필연성으로 주인공을 몰고 가기 위해 용을 쓰다가 그만, 제풀에 지쳐 에라이 뿅! 이쯤에서 주인공 자살(혹은 즉사)! 뭐 이런 식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학부 시절 은사님들께 '자넨 기본기가 덜 된 친구구먼'이란 소릴 자주 들었고. 아울러 낙제에 가까운 학점까지 덤으로 받곤 했다. 다시 말해 논리박약, 의지부족.

그때마다 나는 좀 억울했다. 하지만요, 선생님. 세상 사는 게 언제나 필연적이진 않잖아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게 더 많잖아요? 꼭 그런 소설들만 써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요? 그러니까, 여태껏 그렇게 살아오지 못한 저 같은 친구는…… 그게 참 이해하기 어렵고, 해독하기 힘든, 난수표 같단 말입니다…… 한번도 대놓고 말을 하진 못했지만, 나는 늘 그렇게 생각했다. 말 그대로 그렇게 살아오지 못했으니까. 내 혈액형이 내 마음대로 정해지지 못했던 것처럼.

그러니까 이 소설은 학부 시절 은사님들께 드리는 나의 때늦은 변명이기도 하다. 누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소설은 그 사람이 살아온 이력만큼 나온다고. 나는 에라이, ! 만큼 살았으니, 에라이, ! 같은 소설을 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누가 뭐라 하더라도 그것이 나에겐 리얼리즘이었으니까. 그것이 내 태생이었으니까.

이기호,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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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그의 인생에서 'Es muss sein!'이라는 것, 혹은 위대한 필연성은 없는 것이라고 결론 내려야만 할까? 내 생각에는 한 가지 필연이 있었다. 사랑이 아니라 직업이었다. 그가 의학을 택한 것은 우연이나 합리적 계산이 아니라 깊은 내면의 욕구에 따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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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처럼 심오한 그 어떤 것으로부터 그가 어떻게 그리 단호하고 쉽사리 빠져나올 수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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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누구에게나 전혀 개연성 없는 위험을 두려워할 권리가 있다. 그렇다고 치자. 그가 자기 자신과 자기의 서툰 처신에 화가 났으며 결국 자신의 무력감만 자극할 게 뻔한 경찰과의 접촉을 피하고 싶었다는 것도 그럴 수 있다고 치자. 또한 아스피린이나 처방하는 의원의 기계적 일이 그가 꿈꾸었던 의사라는 직업과는 동떨어진 것이니 실질적으로 이미 직업을 잃은 것이나 진배없다는 것도 그렇다고 치자.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을 감안해도 그가 한 결심의 돌발성은 아무래도 내게는 이상하게 보인다. 혹시 그 결정 뒤에는 보다 심오한 무엇, 자기 자신의 이성적 사고로도 포착되지 않는 그 무엇이 숨어 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312-31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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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베토벤은 희극적 영감을 진지한 4중주로, 농담을 형이상학적 진리로 환골탈태시킨 것이다. 이것은 가벼운 것에서 무거운 것으로의 전이(파르메니데스에 따르자면 긍정적인 것이 부정적으로 변화한 것)라는 흥미로운 예다. 이상한 노릇은 이 환골탈태가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역으로 베토벤이4중주의 진지함으로부터 뎀브셔의 지갑에 대한 4중창에서 보여 준 가벼운 농담으로 변했다면 우리는 분개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면 그것은 완전히 파르메니데스의 정신에 부합한 행동이 되었을 것이다. 무거운 것을 가벼운 것으로, 그러니까 부정적인 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바꿀 수도 있었다! 처음에는(불완전한 초고 형태로서) 형이상학적 진리였지만 끝에 가서 (완성된 작품으로서) 더할 나위 없이 가벼운 농담이었을 수도 있었다! 다만 우리는 파르메니데스처럼 사고할 수는 없다.

내 생각에 토마시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공격적이고 장중하고 엄격한 "es muss sein!"에 짜증이 났고, 그의 가슴속에는 파르메니데스의 정신에 따라 무거운 것을 가벼운 것으로 바꾸고 싶다는 깊은 욕망이 있었다. 그가 단숨에 첫 번째 부인과 그의 아들을 더 이상 보지 않기롤 작정하는 데에는 일 초도 걸리지 않았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와 인연을 끊겠다는 것을 알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는 점을 상기하도록 하자. 이런 것이 그에게 무거운 의무처럼 "es muss sein!" 으로 고착되고자 하는 것을 밀쳐 버렸던 급작스럽고 비이성적 태도와 뭐가 다를 게 있겠는가?

물론 의학에 대한 그의 애정에서 비롯된 "es muss sein!"은 내면적 필연성이었던 반면, 그때 그것은 사회적 관습이 개입한 외부적 "es muss sein!"과 관련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결 어려웠다. 내면의 명령은 더욱 강렬하고 그래서 더욱 강하게 반항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외과의사는 사물의 표면을 열고 그 안에 숨은 것을 들여다본다. 토마시에게 "es muss sein!"의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보러 가고 싶은 생각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마도 이런 욕망일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때까지 자신의 소명이라 믿었던 모든 것을 털어 버렸을 때 삶에서 무엇이 남는지 보고 싶은 욕망.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316-31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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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을 추면서 그녀는 토마시에게 말했다. "토마시, 당신 인생에서 내가 모든 악의 원인이야. 당신이 여기까지 온 것은 나때문이야. 더 이상 내려갈 곳도 없을 정도로 밑바닥까지 당신을 끌어내린 것이 바로 나야."

"무슨 소릴 하는 거야."하고 토마시가 반박했다. "밑바닥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취리히에 있었다면 당신은 환자들을 수술했겠지."

"당신도 사진 일을 했겠지."

"비교할 수 없어. 당신에게 의사 일은 이 세상 무엇보다도 중요했지만 나는 어떤 일을 하거나 상관 없어. 나는 잃은 것이 아무것도 없어. 당신은 모든 것을 잃었는데."

"테레자, 내가 이곳에서 얼마나 행복한지 당신은 모르겠어?"

"당신의 임무는 수술하는 거야!"

"임무라니, 테레자, 그건 다 헛소리야. 내게 임무란 없어. 누구에게도 임무란 없어. 임무도 없고 자유롭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얼마나 홀가분한데."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50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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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27 & 28 )

 

 

MCKENZIE : So you got a boy friend?

SUMMER : Nooo.

Tom shoots daggers at Mckenzie for that comment. Mckenzie mouths "what?" Summer sees nothing.

M : Why not?

S : Don't really want one.

M : Come on. I don't believe that.

S you don't believe a woman could enjoy being free and independent?

M : Are you a lesbian?

S : No, I'm not a lesbian. I'm just not comfortable being somebody's "girlfriend." I don't want to be anybody's anything, you know?

M : I have no idea what you're talking about.

S : It sounds selfish, I know, but... I just like being on my own. Relationships are messy and feelings get hurt. Who needs all that? We're young. We're in one of the most beautiful cities in the world. I say, let's have as much fun as we can have and leave the serious stuff for later.

M : Holy shit. You're a dude.

TOM : (ignoring him) So then... whtat happens if you fall in love? Summer laughs at this.

T : What?

S : You don't actually believe that, do you?

T : Believe what? It's love, it's not Santa Claus.

S : What does that word even mean? I've been in relationships before and I can tell you right now I've never seen it.

T : Well maybe that's cause --

S : And I know that today most marriages end in divorce. Like my parents.

T : Well mine too but --

S : I read an article in the New Yorker, says that by stimulating a part of the brain with electordes you can make a person fall in "love" with a rock. Is that the love you're talking about?

M : Me thinks the lady doth protest too much.

S : The lady dothn't. (to Tom) There's no such thing as "love." It's a fantasy.

T : I think you're wrong.

S : Really? And what exactly is it I'm missing?

T : You'll know it when you feel it.

 

S : (rolls her eyes) How bout we just agree to disagree.

 

(DAY 488)

 

 

T: You, uhm, you’re married?

S: Yeah. It’s crazy huh?

T: You should’ve told me. When we’re at the wedding, when we’re dancing.

S: Yeah. You didn’t asked me.

T: That he was in your life. So why did you danced with me?

S: Cause I wanted to.

T: You just do what you want. Don’t you? You never want to be anyone’s girlfriend and now you’re somebody’s wife.

S: Yeah. It surprised me too.

T: I don’t think I’ll ever understand that. I mean, it doesn’t make sense.

S: It just happened.

T: Yeah, that’s what I’ll never understand. What just happened.

S: I just, I just woke up one day and I knew.

T: Knew what?

S: What I was never sure of with you.

T: You know it sucks, realizing that everything you believed in is complete bullshit.

S: What do you mean?

T: You know. Destiny and soulmates, true love and all that childhood fairy tale, non sense. You’re right I should’ve listen to you.

S: No.

T: Yeah. Why are you smiling? What?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S: Well you know. i guess it’s cause i was sitting in a dely and reading dorian gray and a guy comes up to me and asked me about it and now he’s my husband.

T: Yeah, and so?

S: So what if I’d gone in the movies? What if I had gone somewhere else for lunch? What if I’d gotten there ten minutes later? It was meant to be. I just kept thinking Tom was right. Yeah, I did. I did. It just was me that you weren’t right about. I should go. But I’m really happy that you’re doing well.

T: Summer, I really do hope that you’re happy.

영화 <500 Days of sum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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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꼭 그 사람이어야 할 필요가 없는 우연을 반드시 그 사람이어야 할 운명으로 바꾸는 것

이동진 영화평론가, 영화 <500 Days of summer> 20자평

 

Q4-1. 작품 전체에 반복되는 “Es muss sein!"(그래야만 한다!)은 책에서도 나오듯 처음엔 농담 같은 가벼운 말이었다. 친구가 돈을 갚지 않아 생긴 가벼운 에피소드 쯤 이었다. 그러나 베토벤이 이 뒤에 필연적인 것, 이라는 말을 붙이고 나니 이 그래야만 한다!’가 조금 더 무겁고 운명적이게 들려왔다. 그래야만 했었다. 이미 쓰여져 있는 일이었다. 와 같은... 정말 운명은 무거운 것이고, 우연은 가벼운 것일까? 우리는 과연 그렇게 그 둘을 나눌 수 있을까. 토마시가 하고자 했던 것, (바구니에 떠내려온 아기로 묘사하며) 너무도 무겁게 느껴지던 테레자를 가볍게 만드는 것. 그 후 "임무라니, 테레자, 그건 다 헛소리야. 내게 임무란 없어. 누구에게도 임무란 없어. 임무도 없고 자유롭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얼마나 홀가분한데." 라고 말하는 것을 당신은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Q4-2. 우연과 운명에 관한 이야기는 어쩌면 너무나 진부한 논의일지도 모른다. 알 수 없다, 라고 말하거나 이미 아인슈타인적 세계관과 뉴턴적 세계관을 통해 극복된 지 오래인 논의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묻고 싶다. 항상 나에게 있어 운명이란 것은, 그리고 우연의 마주침들은 중요했다. 그래서 묻고 싶다. 운명을 믿으며 살아가는 것과 모든 일은 우연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 이 둘 중 무엇이 더 당신에게 가까운지.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삶을 선택한 이유는, 이유가 없다면 그 둘의 차이는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이야기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