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a book lover

자기 앞의 생 /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국내도서
저자 : 에밀 아자르(Emile Ajar) / 용경식역
출판 : 문학동네 2003.05.06
상세보기



Now playing - wicked little town / stephen trask


Q1-1)  제시문 (가)를 보면 로맹 가리가 또 다른 이름인 에밀 아자르로 작품 활동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작품 중의 하나가 『자기 앞의 생』입니다. 굳이 로맹 가리가 또 다른 이름으로 작품을 써내려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정확한 사실이 아닌 자신들의 생각과 추측을 써주시면 됩니다.)

A1-1)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이 될 때, 또 21살 새로운 날을 맞고 싶었던 언젠가. 나는 나의 새로운 이름을 짓기 위해 애썼다. 그 이름은 내가 좋아했던 책에 나오는 문구가 되기도 했고, 여러 영어이름을 조합한 이름이 되기도 했다. 내가 그 행위에 그렇게도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은 이유는 딱 하나였다. ‘조금 다른 삶을 살고 싶어서’ 그 말은 결국 이전의 나의 삶이 별로 맘에 들지 않아서.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조금 달라졌고 달라지고 싶다는 것을 언젠가 알려주기 위해서. 아니면 조금은 덜 진실되고 싶어서 혹은 더 진실되고 싶어서. 또 다른 나의 자아를 만들어 새로운 나로 살아가고 싶어서. 로맹 가리의 그 노력도 비슷한 것이 아닐까. 새로운 삶을 글로나마 살아보고 싶어서. 새로운 자신의 모습을 갖고 싶어서.


Q1-3) 제시문 (다)에서의 그림은 추상주의의 거장 마크 로스코가 생을 마지막으로 자살하기 전 그린 작품이며, 제시문 (라)는 그것을 재해석한 오늘날의 연극 《레드》의 한 장면입니다. 이렇게 자신들의 여생 혹은 생을 무엇으로 표현해 내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여러분들에게 ‘자기 앞의 여생’이란 무엇인가요? (꼭 무엇으로 나타내야만 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각자가 생각하는 자신들만의 ‘여생’을 묻고 싶습니다.)

A1-3) 마크 로스코의 레드를 보고 많은 생각이 들었었다. 그에게 있어 죽음이라는 건, 생의 마지막이라는 건 상상할수록 설레이고 즐거운 일이라고 했었다. 그런데 왜 그의 진짜 마지막(작품)이랄 것은 보자마자 소름이 끼치도록 피의 색, 아주 붉은 피의 색을 띄었을까. 고통의 이미지를 주는 그런 이미지를 남겼을까. 그가 경험한 진짜 죽음은 사실 평화롭고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즐거움이 아니라 끔찍하게도 고통스럽고 두려운 무언가였을까. 나는 언젠가 바닷가에 놀러가 사람들이랑 놀다가 유언을 남기는 동영상을 찍었었다. 상황이 장난스럽기도 했지만 나는 그 카메라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이제 세상을 떠나요. 저는 행복하니 남은 분들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결국 나에게 여생은 새로운 죽음을 위한 새로운 세상을 위한 것이다. 분명 나에게는 이미 쓰여져있는 죽음이, 다른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거라 믿으니까.


Q2-2) 자신이 겪은 고통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나요? 있다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해보았습니까? 혹은 외면했습니까?

A2-2) 작년의 많은 실연으로 나는 누군가에게 연애감정을 좀처럼 느끼지 못하고 여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음악을 듣거나 가족을 사랑하는 것,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말을 하고 행동하는 것. 캔디크러쉬소다를 하루종일 하거나 방에 하루종일 누워있는 것. 그것 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아마 나의 남은 여생동안 극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뭐 어쩔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만난 장애물 앞에서 그 장애물을 넘어가거나 넘으려 노력하지 않고 그 옆을 조용히 돌아 가더라도 내 삶은 앞으로 나아갈 테니까. 오히려 장애물을 넘으려 노력하다가 멍만 들고 피만 흘릴 테니까.


Q3-1) 책 속의 등장인물들은 각각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 어떤 식으로 행동하나요? 등장인물의 행동 중 공감이 되거나 공감이 되지 않았던 부분은 어떤 부분인가요? 가령, 쉬페르를 너무나 사랑하여 500프랑을 받고 판 후 그 500프랑을 버린 모모의 행동은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요?

A3-1) 모모에게 있어서 돈이라는 존재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계속해서 엄마의 존재를 갈구하고 로자 아줌마의 사랑을 원하는 그에게 있어 돈이라는 건 결코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을 것이다. 모모에게 있어 돈은 그저 사랑을 얻기 위한 것일 뿐 종이조각이나 덩어리 다름 아니었을 것이다.


Q3-2) 모모는 자신을 보살펴주었던 로자 아줌마를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하지만 요즘 사회에서는 제시문 (아)의 기사처럼 자신을 낳아주신 부모님, 같이 사는 형제에게 못할 짓을 하는 뉴스를 자주 접할 수 있는데요. 왜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기가 이렇게 힘들어진 것일까요?

A3-2) 그들에게는 사랑이나, 관계보다 돈이 우선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사랑받은 기억이, 사람과 관계하며 즐거웠던 기억보다 배신당하고 힘들고 괴로웠던 기억이 더 많았기에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돈을, 물질을 중요시 여겼을 거라 생각한다. 슬픈 일이다.


Q3-3) 모모는 제시문 (자)에서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말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정말 사람은 사랑 혹은 사랑하는 사람 없이 살 수 없을까요?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사랑이 꼭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유롭게 대답해 봅시다. 

A3-3) 사랑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은 나에게 사람과의 관계없이 살아갈 수 없다는 말처럼 들린다. 왜 누가 미워하는 것도 사랑이 있어야 할 수 있다 하지 않았나. 나는 사람과의 관계없이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 속에서 분노하고 미워하고 사랑하더라도 사람 사이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사랑은 사람과의 관계를 가장 아름답게 그리고 살아볼 가치가 있게 만들어주기 때문에 사랑이 꼭 필요한 것이 아닐까. 내가 사람과의 관계를 가장 중요시여기는 마을 공동체 일을 하면서 가장 회의적이었던 부분은 가까이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마을, 지역운동 ,청년 당사자성 운동 등의 번지르르한 말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나는 괴로워졌고 나 또한 그렇게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 외로워지기도 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전화를 한 통이라도 더 하기 시작했고, 함께 밥을 먹기 시작했고, 요리를 해서 드리기도 했다.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부모님과 더 많은 이야기를 했고 그런 우리의 사랑은 내가, 엄마와 아빠가, 언니가 밖에 나가 일을 하는데도 아주 큰 힘이 되었다. 이래도 우리 사회에서 사랑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 할 수 있을까?


Q4-1) 작가는 책에서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우리 사회는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나요? 또한 나는 이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A4-1) 작년에 혼자 꿨던 꿈이 있다. 다양한 사람이 존중받는 다양한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는 꿈. 그래서 마을 일을 시작했고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졌고 LGBT에 관한 글을 읽고 퀴어 페스티벌에도 다녀왔다. 나는 넉넉지도 않고 마냥 화목하지만은 않은 가정에서 자라왔지만 내가 만난 그 어떤 사람들보다 사랑받았고 사회로부터 인정받으며 살아왔다.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다가도 나 자신도 소외되어있는 아래 계급의 사람이라는 것을 동시에 느꼈다. 나는 소외되어있으면서도 소외되어있음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마을에서 나는 그들 사이의 10년 인연 속에 들어가지 못하는 소외된 사람이었고, 나는 여성이라는 성별로 노력으로는 이룰 수 없는 문제에서 소외된 사람이었으며, 내가 완벽한 이성애자인지 파악하지 못한 채 양성애자에도 동성애자에도 속하지 못하는 어정쩡한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이 사회에 존재하고 있던 아주 당연한 계급에 대해 슬프게도 눈 뜨게 된 건 나에게 견디기 힘든 나날이었다. 언젠가부터 사람들보다 몇 계단 위에 서서 바라보고 있다고 느꼈던 내가 사실 그 사람들과 같은 계단에 어쩌면 아주 높은 계단의 시작 언저리에 있었을거라 생각하니 치가 떨리도록 부끄러웠다. 그래서 나는 소외되었다. 내가 소외된 사람임을 깨닫고 더더욱 소외되었다. 그러다 이를 몰랐던 나의 소외되었던 시절을 떠올렸고, 그것을 마치 아무와도 교류하지 않아도 나만의 색깔을 만들어가는 힙스터와 비슷한 것으로 의미 부여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나의 그런 생각을 존중해주는 사람은 옆에 있었고 그렇기에 나는 그 생각을 더욱 공고히 만들어나갈 수 있었다. 지금도 나는 소외되었다. 사실 소외된 사람이 일부라고 생각하지만 그리고 나는 그 소외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우리 모두의 어느 일부분은 소외되어있다. 자신이 소외되어있음을 깨닫는 순간은 너무나 비참하다. 그간의 자신의 일들이 모두 떠오르고 그것은 몸서리치도록 부끄럽고 슬프다. 그렇지만 자신이 소외되어있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즐기는 자들은 퀴어페스티벌의 그들처럼, 어쩌면 힙스터라고 칭송받는 그들처럼 당당해질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을 보는 시선 또한 그들의 당당함을 그들만의 색을 인정해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을 인정할 수 있도록 공정한 사회와, 사회적인 안전망을 구축하는 것이 일순위가 아닐까. 돕는 누군가의 입장이 아니라 지지하는 누군가의 입장에 서서 말이다. 매드맥스의 맥스가 퓨리오사를 도왔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