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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book lover

모래의 여자 / 아베 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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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 바람과 흐름이 있는 이상 모래땅의 형성은 불가피한지도 모르겠다. 바람이 불고 강이 흐르고 바다가 넘실거리는 한, 모래는 토양 속에서 끊임없이 생성되어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기어 다닐 것이다. 모래는 절대로 쉬지 않는다. 조용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지표를 덮고 멸망시킨다…….

유동하는 모래의 이미지는 그에게 뭐라 말할 수 없는 충격과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모래의 불모성은 흔히 말하듯 건조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끊임없는 흐름으로 인해 어떤 생물도 일체 받아들이지 못하는 점에 있는 것 같았다. 일 년 내내 매달려 있기만을 강요하는 현실의 답답함에 비하면 이 얼마나 신선한가.

물론 모래는 생존에 적합하지 않다. 그렇다면 정착은 과연 생존에 절대적으로 불가결한 것인가 정착을 부득불 고집하기 때문에 저 끔찍스런 경쟁이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만약 정착을 포기하고 모래의 유동에 몸을 맡긴다면 경쟁도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사막에도 꽃은 피고 벌레와 짐승도 산다. 강한 적응력을 이용하여 경쟁권 밖으로 벗어난 생물들이다. 예컨대 그의 길 앞잡이 속처럼…….

마음속으로 유동하는 모래의 이미지를 그리면서 그는 간혹 자기 자신이 유동을 시작한 듯한 착각에 빠지는 일도 있었다.

(아베 코보, 모래의 여자, 19~ 2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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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도 모르게 움찔 놀라, 우뚝 서고 만다. …… 이 집은 죽어가고 있다. …… 끊임없이 흐르는 모래의 촉수가 내장의 거의 절반을 파먹었다……. 평균 1/8mm란 것 외에는 형태조차 제대로 갖고 있지 않은 모래……. 그러나 이 무형의 파괴력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무엇 하나 없다……. 어쩌면, 형태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야 말로, 힘의 절대적인 표현이 아닐까…….

(아베 코보, 모래의 여자, 3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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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쪽에서 생각하면 형태가 있는 모든 것이 허망하다. 확실한 것은 오로지 모든 형태를 부정하는 모래의 유동뿐이다. 그러나 판자벽 하나 건너 저편에서는 여전히 모래를 퍼내는 여자의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다. 저렇게 연약한 여자의 팔로 대체 뭘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거의 물을 휘저어 집을 지으려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물 위에는 물의 성질에 따라 배를 띄워야 마땅하다.

(아베 코보, 모래의 여자, 4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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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왠지 확신할 수 없었다……. 조여들 듯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모래벽을 보고 있노라면, 아까 기어오르려다 떠밀려났던 비참한 실패가 떠오르고 만다……. 몸부림만 칠 뿐 아무 효과도 없는, 전신을 마비시키는 무력감……. 이곳은 이미 모래에 침식되어 일상적인 약속 따위는 전혀 통용되지 않는 특별한 세계 인지도 모른다…….

(아베 코보, 모래의 여자, 5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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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에 빠뜨렸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함정에 빠져, 병들어 죽고 만 불쌍한 엽서장이. 그러나 그 엽서장이가 섣부른 사기꾼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어쩌면 진심으로 이 풍경에 꿈을 걸고 사업을 일으키려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대체 이 아름다움의 정체는 무엇일까? ……자연이 지니는 물리적인 규율과 정직함 때문일까, 아니면 반대로 어디까지나 인간의 이해를 거부하려 하는 그 무자비함 때문일까?

하기야 어제까지만 해도 이런 풍경 따위 생각만 해도 가슴이 컥컥 막혔었다. 사실 홧김에 엽서장이 따위의 사기꾼에게는 딱 어울리는 구멍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렇다고 그 구멍에서의 생활과 이 풍경을 대립시켜 생각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아름다운 풍경이 인간에게 관대해야 할 필요 따위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결국 모래를 정착의 거부라고 생각한 나의 출발점에 별 틀림은 없었다는 셈이 된다. 1/8mm의 유동…… 상태가 그대로 존재인 세계……. 이 아름다움은 다름 아닌 죽음의 영토에 속하는 것이다. 거대한 파괴력과 폐허의 장엄함으로 통하는 죽음의 아름다움이다.

(아베 코보, 모래의 여자, 174~ 17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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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여름, 설레는 마음으로 제주도행 비행기를 탔다. 꿈꾸던 가치가 곧 실현되리라는 희망에 부풀어 실연의 쓰라린 아픔도 잊은 나였다. 그건 분명히 관념의 체험이었다. 그러나 '청년 정신', '공정 여행', '집단 지성' 모든 희망의 단어가 총출동된 그 56일은 끔찍했다. 서로를 배려하는 청년 정신은 없었고, 지역을 위한 공정여행도 없었다. 각자가 가진 지성을 모은다는 집단 지성은, 하늘을 날아 가지고온 2.6kg짜리 노트북을 휴대폰 충전기로 전락시켰다. 56일의 체험은 나로 하여금 관념의 체험 이라는 공포를 느끼게 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마저 가져왔다.

어느 겨울, 모래 구덩이에 갇힌 니키 준페이를 보았다. 단조로운 그의 삶에 유일한 희망적 관념은 모래였다. 경이로움마저 느꼈다. 그 여름날들이 떠올랐다. 그저 그래도 배운 게 많았지라는 말로 덮어두었던 그 날들이 떠올랐다. 만약 내가 그곳에서, 그 끔찍했던 56일에서 벗어나지 못했더라면? 새끼줄 사다리가 사라졌듯 뭍으로 돌아오는 비행기가 사라졌더라면? 그래도 나는 그래도 배운 게 많다, 라는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나의 관념이 체험되는 그 순간. 희망이 공포로 변화하던 그 순간. 그 순간을 거쳐 돌아왔기에 그땐 그랬지, 라고 회고할 수 있는 건 아닐까.

 

...

Q3. 관념이 체험으로 바뀌는 순간 우리는 또 다른 희망을 발견하게 될까, 공포를 느끼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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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감자 껍질을 벗기기 시작하는 여자의 뒷모습을 곁눈질하면서 남자는 여자가 지은 밥을 순순히 받아들일 것인지 어쩔 것인지, 그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했다.

물론 지금은 침착과 냉정이 필요한 때이다……. 상대방의 의도가 확실해진 이상, 우왕좌왕하기보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실질적인 탈출 계획을 짜야 할 것이다……. 불법행위를 규탄하는 것은 그 다음에 해도 된다……. , 공복은 의욕을 앗아간다. 정신 집중에 좋지 않다. 그렇기는 하나 현상을 거부할 작정이라면 식사를 포함한 모든 것을 철저하게 거부해야하지 않는가. 화를 내면서 밥을 받아먹으면 우스꽝스러워진다. 개도 먹이를 입에 넣는 순간 꼬리를 내리고 만다.

하나, 서둘러서는 안 된다……. 상대방이 어느 정도 강한지 파악하지도 않고서 그렇게까지 수동적이 될 필요는 없을것이다……. 뭐 거저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것도 아니고……. 식비는 제대로 지불할 것이다……. 돈을 지불하는 이상 부담을 느낄 필요는 조금도 없다…….

(아베 코보, 모래의 여자, 6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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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안개 같은 것이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몸을 움칠거리자, 바스락바스락 마른 종이 소리가 났다. 펼친 신문지가 얼굴을 덮고 있는 것이다. 제길, 또 자고 말았어!……뿌리치자, 종이 표면에서 모래 피막이 흘러내렸다. 그 양으로 보아 상당한 시간이 흐른 것 같다.

(아베 코보, 모래의 여자, 8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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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의무란 것이 인간의 여권이라 해도, 어째서 그런 놈들에게까지 비자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인가! …… 인생이란 그런 종잇조각이 아니지 않은가……. 반듯하게 덮인 한 권의 일기장이다……. 첫 페이지는 한 권에 한 페이지면 족하다……. 앞 페이지에 이어지지 않는 페이지에까지 일일이 의리를 지킬 필요 따위는 없다……. 설사 상대방이 굶어 죽어간다 해도, 일일이 상대하고 있을 여유는 없는 것이다……. 제길! !……. 그러나 아무리 목이 마르다 해도, 죽은 사람 모두의 장례식에 돌아다녀야 한다면, 몸이 열이라도 남아나지 않는다!

(아베 코보, 모래의 여자, 12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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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고,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욕망을 채운 것은 그가 아니라, 그의 육체를 빌린 전혀 별개의 것처럼 여겨지기까지 한다. 성이란 원래, 개개의 육체가 아니라 종의 관할 하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기 역할을 끝낸 개체는 재빨리 자기의 원래 자리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행복한 것만이 충족으로……. 슬퍼하는 것은 절망으로……. 죽어가고 있는 것은 죽음의 자리로……. 이런 속임수를 야성의 사랑이니 뭐니 하고 뻔뻔스럽게 잘도 갖다 붙였다……. 정액권 성과 비교하여, 과연 어딘가에 쓸모 있는 점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유리로 된 금욕주의자가 되는 편이 그나마 나았으리라.



(아)

미쳤어……. 제 정신이 아니야……. 모래 퍼내는 것쯤, 훈련만 받으면 원숭이도 할 수 있는 일이잖아……. 난 좀더, 나은 일을 할 수 있다고……. 인간에게는 자기가 갖고 있는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의무가 있단 말이야…….

글쎄…….

노인은 모여앉아 두런두런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하던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나는 것처럼 태연하게 말했다.

(아베 코보, 모래의 여자, 14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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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엿이나 먹어라! 내게도 좀 더 번듯한 존재 이유가 있을 거 아니냔 말이야!’

아하, 자네가 그리 좋아하는 모래를 가지고 생트집을 잡아서야 쓰나.’

생트집……?’

세상에는 말이야, 10년이나 걸려서, 원주율을 소수점 이하 백 자리까지 계산한 사람도 있다고 하더군……. , 그렇게 하기까지는 나름대로 존재 이유도 있었겠지……. 하지만, 자네는 그런 존재 이유를 거부했기에 굳이 이런 데 까지 찾아온 거…….’

그렇지 않아! ……모래에는 정반대 면도 있다고…… 예를 들면, 그 성질을 역으로 이용해서, 주형도 만들잖아! ……그리고 콘크리트를 굳힐 때도 빼놓을 수 없는 재료고……. 그 밖에 잡균이나 잡초를 제거하기 쉬운 점을 이용해서, 무균농경과 순수경작 같은 것도 연구되어 있다고……. 게다가 토양 분해효소를 사용해서, 모래를 흙으로 바꾸는 실험도 행해졌을 정도란 말이야……. 모래라고 해서…….’

어허, 교리를 바꾸셨군……. 그렇게 쉬 주장을 바꿔서야, 대체 어느 쪽을 믿어야 할지 알 수가 없지 않은가.’

이런데서 쓰러져 죽고 싶지 않다고!’

어차피 오십보백보 아닌가……. 놓친 물고기는 언제나 크게 보이는 법이지.’

제길, 대체 넌 누구야!’

(아베 코보, 모래의 여자, 207~ 20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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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줘!

늘 정해져 있는 말!……. 아무렴 어떠랴……. 다 죽어가는 판에 개성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나. 판으로 찍어낸 싸구려 과자 신세라도 좋으니, 아무튼 살고 싶다!……. 이제 곧 가슴까지 묻히고, 코밑까지 빠지면……. 그만! 이제 그만!

제발 살려줘!…… 무슨 일이든 약속하겠어! …… 제발 부탁이니까 살려줘! …… 살려달라고!

끝내 남자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베 코보, 모래의 여자, 19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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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란 딱히 패배가 아니다……. 오히려 인내를 패배라고 느끼는 순간부터 진정한 패배가 시작되는 것이리라. 애당초 <희망>이란 이름도 그 정도 생각으로 붙인 것이다. 희망봉은 지브롤터였나……. 케이프 타운이었나……. 남자는 다리를 질질 끌며 돌아간다. …… 또 잘 시간이 돌아온 것이다.

(아베 코보, 모래의 여자, 209p)(아베 코보, 모래의 여자, 13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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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로 인해 그의 삶이 좀 더 나아지지 않았느냐 하는 생각. 아니 나아졌다기 보다도, 그가 바랐던 삶을 살고 있지 않느냐 하는 생각 말이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달라 보이고 싶었던 그 아니었던가. 그래서 23일의 휴가를 떠날 때도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지 않았던가. 신비로워 보이고 싶은 어떤 욕망이 그 안에 숨어있던게 아니었을까. 그런데 그 욕망은 곧 모래 구덩이에서 살게 되면서 실현되었다. 외부의 사람들로부터 그는 '행방불명 상태'가 되었고, 7년이 넘는 시간동안 그의 모습 어떤 것도 사회에 드러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가 바랐던 다른 사람들로부터 다른 누군가. 어느 정도는 실현한 것이 아닐까. 그런데 또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결국 인간에게 있어 의미 있는 삶 같은 건 그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은 것은 아닐까. 무엇을 바라는 것 자체가 인간에게 주어진 능력 밖인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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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4. 그의 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욕구는 무엇이었을까, 여러분의 생에 가장 중요한 욕구는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