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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 최인훈



광장/구운몽

저자
최인훈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2009-08-2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광장이 없는 밀실과 밀실이 없는 광장-남과 북의 분단과 대결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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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데탕트 시대라고 한다. 국민 전체가 안전 불감증에 걸렸다고도 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항상 북한의 도발에 움찔하고 내가 ‘빨갱이’, ‘종북’으로 몰리지는 않을까 하는 작은 두려움마저 갖고 있다. 과연 우리나라 국민들은 데탕트 시대에 살고 있는걸까? 남북 분단이 이제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져서 이야기 꺼내는 것이 도리어 이상한 사람이 되는 이 상황이 과연 옳은 것일까 생각해본다. 작품속에서 이명준은 또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밥과 옷을 제 손으로 번다는게 생활이란 말의 뜻일까? 갖은 화려한 공상과 괴로운 생활의 골짜기를 거쳐 이른다는 데가 밥과 옷인가. 그런 모양이다. 그러나 그걸 어떻게 버느냐를 가지고 다투어 오는게 아닌가? 편집장 말이 생각난다. “동무는 오해하고 있는 듯해. 공화국을 동무가 도맡아 보살펴야 한다는 그런 생각. 그건 잘못입니다. 동무는 맡은 바 자리에서 당이 요구하는 과업을 치르면 그만입니다. 영웅주의적인 감정을 당은 바라지 않습니다. 강철과 같이 철저한 실천자가 아쉬운 겁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저 뒤얽힌 산업 질서의 개미굴 속에서, 나날이 사람스러운 부드러움을 잃어가는 사람들과 꼭 같이 되라는 소리였다.(p.180)

  결국 우리는 무슨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일까? 단순히 밥을 먹고 옷을 살 돈을 버는 것 그 자체로 삶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남한에서도 북한에서도 이 작품에서 말하듯 어떤 것을 변화시키라는 명령은 없다. 오히려 변화를 꿈꿀 때 우리는 삶의 위협을 받게 된다. 작품을 통해 우리는 진정으로 남한이 북한이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것은 지금 어떻게 변화하였는지, 혹은 어떤 부분이 변화하지 않았는지, 우리는 무언가를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지, 변화라는 것에 얼마나 큰 가치를 두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한다.


2. 이명준이 중립국행을 택하지 않았더라면, 그가 바다에 그 자신의 몸을 던지는 일도 없지 않았을까 문득 생각해본다. 그가 중립국행을 선택하고 읊조리던 중립국에서의 생활을 떠올려본다. 그 속에 그가 평생 치열하게 고민해오던 이데올로기라든가, 사랑이라든가, 인간 실존문제 따위는 없었다. 작품 초반 그는 무언가 마지막 것을 얻기만 하면 다시 생각이란 이름의 화냥년을 잠자리에 들이지 않으리라 마음먹는다(p.46) 말했다. 하지만 그것도 그의 천성인지라 그가 생각이라는 것을 떼어 놓고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었을까? 그가 중립국행을 선택한 후 읊조렸던 것처럼 어느 병원의 경비원으로, 어느 마을의 소방관으로 고뇌하지 않고, 되는 대로 살아가는 그런 인생을 그가 진정 받아들이며 살 수 있었을까? 나는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결국, 배에서 채 던지지 못한 자신의 몸을 중립국 어느 빌딩 옥상에서 해치웠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이 그리 될 것이라는 걸, 그 또한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천성을 자신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그저 그런대로 사는 삶 같은 건 그에게 태어날 때부터 쥐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그래서 다시 생각해본다. 내가 저 때의 이명준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아마도 남한을 선택하였을 것이다. 어느 한쪽에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 정 붙일 사람, 하나 남아 있지 않지만 적어도 남한에는 일말의 자유가 남아있지 않은가. 그 자유 속에서 나의 천성을 맘껏 발휘해볼 희망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지 않은가. 나의 천성으로 인해 잃어버린 사람들과 고통 받은 시간들의 경험, 또 그 천성을 버릴 수 없는 나 사이에서 고뇌하고 고민하겠지만, 살기 위해 그저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아니라 진정으로 삶을 살아내기 위해 남한 행을 선택했을 것이다. 중립국으로 떠난 다는 것은 결국 그 자신을 무(無)의 바다에 던지는 것과 다름없으므로.


3. 나란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무엇을 위해 살아 왔는가. 고민이 되는 요즘의 날들이다. 어제였던가. 누군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물론 누구나 다 한 가지씩 뭔가 특별한 것을 가지길 원하지만 사실 이미 가지고 있는데도 자기 자신은 모르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고, 널 보면 항상 자신감 넘쳐 보이고 예쁘고 생기있고 가진게 많은데 왜 우울해 하냐는 말이었다. 우울해 하는 나를 달래주기 위해 했던 말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큰 힘이 되었다. 특히 저 예쁘다라는 말. 농담이고(;;) ‘뭔가 특별한 것을 가지길 원하지만’ 이 대목에서 어떤 울림을 받았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어떤 희망 같은 것을 어려서부터, 아주 어려서부터 꿈꾸었다. 물론 모두가 자신이 세상의 주인공이라 생각하겠지만 나는 더욱 더 그것에 집착해왔던것 같다. 결국 나의 정체성은 특별한 사람이고자 집착하는 나의 의지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책에서 힌트를 얻고, 음악에서 울림을 얻고, 한 사람 한 사람의 말에, 행동에 흔들리면서도 그것이 나의 정체성과 곧바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내 머릿속에서, 또 내 입에서 전해지며 다듬어지고 새로운 모양을 만들어내며 나의 정체성을 만들어나간다. 나의 정체성이 완성되리란 기대도 없지만 매일같이 나 자신이 실재함을 느끼며 정체성을 형성해나간다.


4. 오늘날 세상처럼 사람이 '영웅의 삶'을 살 수 없는 때도 없다. 사람이 달라진 게 아니고, 조건이 달라진 것이다. 조건을 쑥 뽑은 다음에 그 어떤 알맹이가 남는다는 건, 곧 아름다운 미신이다. 나한테도 영웅의 삶을 살고, 영웅의 죽음을 죽을 수 있는 씨앗이 파묻혀있을까. 그건 알 수 없다. 다만, 이 검은 해가 비치는 어두운 광장에서는 피어날 수 없는 씨앗인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그런 광장으로 시민들을 불러내는 나팔수가 바로. (p.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