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는 것과 본 것이 달랐을 때. 우리는 자주 혼란을 겪게 된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너무나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을 보았을 때 우리는 배신감을 느낀다. 그 경우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가지이다. 내가 기존에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을 믿고 본 것을 믿지 않거나, 내가 본 것으로 내가 알고 있던 것을 치환하는 두 가지의 방법. 브리오니는 후자를 택한 것이다.
아는 것과 본 것을 같다고 믿도록 만드는 요소는 축적되어온 경험이다. 축적되어 온 경험이 없을 때 우리는 본 것을 아는 것이라 믿기 십상이고, 축적되어온 경험이 있다면 그 둘을 무조건 같다고 단정 짓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브리오니의 나이, 몽상가적 기질이 후자의 끔찍한 선택을 하게 만든 이유일지 모른다.
-
기억하는 것이 모두 실존하는 것이라 말할 순 없다. 나의 어릴 적 일부 기억은 삶을 살아오며 왜곡되었고 변주되었다. 어쩌면 나는 내 기억을 어느 소설처럼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어렴풋이 떠오르는 어릴 적의 기억들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었는지 아닌지 분간이 가지 않을 만큼 모호하다. 그 기억들이 현재의 나를 이루는 아주 중요한 일부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기억들을 불러낼 수가 없다. 나에겐 그 기억을 담은 사진도, 글도, 그 기억을 함께한 사람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있어, 기억은 곧 실존과 연결된다 말할 수 없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 기억이란, 브리오니의 공상처럼 나만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어떤 것일지도 모른다.
-
마이클 치미노 감독의 저주받은 걸작, <천국의 문>을 보았다. 그 영화는 1890년대 미국의 와이오밍 주에서 일어난 ‘작은 전쟁’을 소재로 하는 영화였고, 3시간 30분이라는 긴 러닝타임 동안 후반부 대부분을 ‘전쟁’ 장면에 할애한 영화였다. 계속되는 총소리와, 죽음에 대한 사실적 묘사, 끊임없이 쓰러져 가는 이주민들, 그리고 그 이주민들의 숫자를 장부에 적는 어느 조합원. 그 반복되는 장면 속에 영화관에 앉아있던 관객들은 그저 한숨을 푹- 쉴 수밖엔 없었다. 감히 대항할 수 없는 국가라는 자본이라는 힘 앞에 어떤 평화로운 공동체도, 사랑도, 자연도 힘을 잃고 마는 듯한 전쟁의 참상은 나의 입을 틀어막았다. 결코 무뎌지지 못했다. 시신이 나뒹굴고 그것이 마치 원래 그랬던 것인 양 그려지는 화면에도, 무뎌지지 못하고 한숨이 나왔다.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인류의 평화, 세계의 평화 이런 것을 원해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건 결코 아니었다. 그저 전쟁을 보며 내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건 그저 한숨을 길게, 이 어둠에 앉아있는 그 누구보다 길게 쉬는 것 뿐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고 답답했다.
-
자신의 어릴 적 선택을 후회하고 오십구 년간 <속죄>를 고쳐 쓰고 또 고쳐 쓰며 자신의 죄를 뉘우치곤 있지만 그 자신도 안다. 이와 같은 일들이 그의 죄를 모두 씻어낼 수 없다는 것을. 그도 그 연인들처럼 하늘 어딘가로 올라가 직접 만나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이렇게 말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지난 오십구 년간 나를 괴롭혀왔던 물음은 이것이다. 소설가가 결과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신과 같은 존재라면 그는 과연 어떻게 속죄를 할 수 있을까? 소설가가 의지하거나 화해할 수 있는, 혹은 그 소설가를 용서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소설가 바깥에는 아무도 없다. 소설가 자신이 상상 속에서 한계와 조건을 정한다. 신이나 소설가에게 속죄란 있을 수 없다. 비록 그가 무신론자라고 해도. 소설가에게 속죄란 불가능하고 필요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속죄를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결말을 바꾼 건,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브리오니는 오십구 년간 <속죄>를 고치고 고쳐왔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속죄도 존재하지 않는다. 연인의 동의가 없는 한 브리오니의 죄는 여전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고 그것은 어떤 것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현재의 사실이기 때문이다.
-
언젠가 어떤 그룹에서 한 친구에게 크게 소리를 질러 화를 낸 기억이 있다. 분명 그 순간에는 그 친구의 잘못이 나의 잘못보다 컸음에도 내가 소리를 질러 화를 냄으로써 나의 잘못이 더 커지는 그야말로 답답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나는 그날 저녁 그 친구의 방을 찾아가 용서를 구하고 또 구했다. 사실 지금 와서 하는 이야기이지만, 용서를 구하며 혹은 ‘속죄’를 하며 나는 그 친구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다는 우월감을 느꼈는지 모른다. 나는 남들 앞에서 잘못 된 점을 지적할 수 있는 ‘정의로운 사람’이며, 비록 그것이 정의로운 행위였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상처받은 여린 친구를 보듬을 줄 아는 ‘성숙한 사람’ 이라는 평가를 나 스스로 내리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와서 보니 그때의 내가 <속죄>를 쓰는 브리오니와 다를 게 무어였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속죄를 한다. 용서를 구하고 사과를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내가 느끼는 감정이 진정으로 그 사람을 위한 것인지 그저 나를 위한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나를 우월하게 만드는 속죄는 하지 않는 것만 못한 행위인지도 모른다.
'a book lov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간의 향기 / 한병철 (0) | 2015.06.19 |
---|---|
불온한 경성은 명랑하라 / 소래섭 (0) | 2015.05.07 |
노인과 바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 (0) | 2015.05.07 |
신의 생각 / 아고르 보그다노프, 그리슈카 보그다노프 (0) | 2015.05.07 |
모래의 여자 / 아베 코보 (0) | 2015.05.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