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을 꿈꾸던 아이들은 어디로갔을까, 오찬호
메모
81
규민이는 '과정의 불공정성' 때문에 노량진으로 갔다. 규민이 학교 선배들도,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대학교'를 아무리 열심히 다녀도 "괜히 대학생 흉내 내지 말고 공무원 학원이나 다녀"라고 주변에서 말한다. 이는 조언도, 격려도 아니다. 조롱이고 멸시이자 혐오다. 개인을 '무기력한 비관주의'에 빠지게 하는 명백한 가해다. 이런 린치를 은정이는 받아본 적이 없다. 이 조건 차이가 집중력과 효율성을 바탕으로 하는 공부 동력의 진짜 차이가 된다. 혹자는 '그럴수록 이를 악물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아침에 출근하다가 개똥만 한 번 밟아도 하루 종일 신경이 쓰이는 게 사람이다. 점심 먹다가 김칫국물이 옷깃에 약간 묻었다고 오후 내내 거울 앞에서 얼쩡거리는 게 사람이다. 규민이는 매일 개똥을 밟아야 했고 매끼 김칫국물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니 '이를 악물' 의지가 사라졌다.
89
2호는 자신이 왜 '정'이었는지 부연 설명했다. 갑은 대기업, 을은 1차 하청업체, 병은 2차 하청업체 사장이다. 1차 하청업체의 신입사원은 2차 하청업체의 사장보다 위다. 그리고 자신은 병에게 고용된 '정'이다. 하청에 하청으로 이어지는 구조 속에서 상식적인 시장논리를 파괴하는 갑질, 을질, 병질 등의 만행이 만연한 대한민국의 기업 시스템에서 2호는 가장 낮은 곳에서 온갖 수모를 다하며 4년을 버텼다. '병' 사장은 '을'에게 당한만큼 '정'을 괴롭혔다. 아마 '을'은 '갑'에게 당한만큼 '병'을 괴롭힌 것 아니겠는가. 노량진 입성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일한 다른 회사에서도 갑 다음 을까지인지, 병까지인지 아니면 정도 아닌 무까지인지의 차이가 있었을 뿐, 근본적으로 굴욕을 견디며 살아야 한다는 건 변치 않았다.
94
"여기 일할 사람 너 말고도 많으니 아니꼬우면 공무원 시험이라도 치든지! 요즘 힘든 거 싫어하는 젊은 녀석들 죄다 공무원 한다고 난리라며? 그런데 그것도 너처럼 의지가 약한 놈이 할 수 있겠어?'
이때, 2호는 수치심보다 '탈출의 실마리'를 발견해서 기뻤다고 했다. 2호는 틈만 나면 인터넷을 뒤졌다. 인터넷에 올라오는 공무원 시험 합격 수기를 읽으니 불가능해보이지 않았다.
97
'공익을 제일 중요시 여기는' 우리 행성에 살면 "누구나 저 위치에서 고통 받을 수 있기 때문에"라는 이유로 불평등을 줄여야 한다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는다. 한국에서처럼 "너는 열심히 해서 저렇게 살지 말라"고 하지 않는다. 비정규직의 문제에 대해 "정규직 하면 되잖아."라고 말하는 부모는 자신이 '개념 없는'어른임을 증명할 뿐이다.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것이 힘들다고 할 때 "대기업 가지 그랬어?"라고 하는 교사는 직장을 잃을 각오로 말해야 한다.
123
현진씨는 학원을 결정하고 그 유명하다던 컵밥도 일부러 찾아가서 맛있게 먹었다. 처음 먹는 컵밥은 정말 맛있다. 공부도 초기에는 꽤 재미있다. 새로운 내용도 그렇지만 정복하기 어려운 난이도가 아니다. 문제는 모두가 그런 기분이라는 사실. 그래서 무미건조한 하루하루가 오늘까지 이르렀다.
132
방마다 가사 그 이상의 의미를 담아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한 언론사는 이 광경을 한 줄로 묘사했다. "이것은 분명 '분출'을 위한 노래다." 현진 씨도 십여 분간 세 곡을 분출했다. 하루 중 유일하게 '입으로 말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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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때부터 논픽션 사회과학 에세이를 좋아하는 현진 씨는 이런 수험 생활 와중에도 사회비평 관련 책들을 읽었다. 그 순간만큼은 머리가 '정상화'되는 기쁨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독서는 평소의 흐름을 깨는 부작용이 엄청났다. 공부를 하다가도 '내가 잘못된 사회의 희생양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진중한, 하지만 쓸모없는 고민을 한 것이 수차례였다. 사회 구조 어쩌고, 내 부모의 배경 어쩌고 따지는 건 공무원 시험에서 1퍼센트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면접에서도 '지양해야 할' 답변 스타일이다. 그러니 자신에게 벌어진 모든 '잘못된 것'들의 원인을 스스로에게 돌리는 습관이 필요하다.
142
60명을 뽑는 직렬이라면 72명이 면접을 본다. 그렇기에 이 면접의 준비는 60여명이 할 만한 말을 하는 게 우선이다. 개성을 보이는 순간 죽음이다. 튀면 눈 밖에 난다. 하루 종일 면접하느라 지쳐 있는 면접관이 볼 때 다른 사람하고 아주 비슷해보여야 한다. 평범해야만 딱히 떨어질 이유가 없는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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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합격하면 꼭 하고 싶었던 일을 현진 씨는 마지막으로 실행에 옮긴다. 수험생들 사이에 슬쩍 섞여 컵밥 먹기다. 아주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던 말, "아, 이 밥도 오늘이 마지막이네"라는 말을 주변 사람 다 듣도록 크게 말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민망함보다 짜릿함이 더 크다. 현진 씨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지 눈치 챈 주인은 밥을 건네면서 "합격하셨나보네요?" 라고 묻는다. 그녀는 "네, 오늘 합격자 간담회 하러 마지막으로 왔다가 생각나서 들렀어요"라고 말하면서 주변을 흘깃 본다. 자신의 옆에는 체육복 차림에 모자를 눌러 쓴 공시족들이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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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던 그대로의 모습이 담겨있었고, 금새 읽어내렸고 할 수 있는 일도 도울 수 있는 일도 없어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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