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처럼 읽기를 읽고 나서 메모하기
<프롤로그>
20 나는 '베스트셀러'를 읽지도 않고 사지도 않는데, 잘 팔리는 책에 돈을 보태고 싶지 않은 '쪼잔한 정의감'이 가장 큰 이유이고, 대개는 별다른 자극이 없기 때문이다. 베스트셀러는 특성상 지적 자극을 주기 어렵다. 통념과 달리 대중은 균질적인 존재가 아니다. 대중은 한 덩어리가 아니다 대중이라는 말 자체가 근대에 탄생한 신생 용어다. 집단이나 사람을 규정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공통분모가 없는, 각자 다른 상황에 놓인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려면 책 내용이 절충적이거나 피상적일 수 밖에 없다.
22 대부분 정치색이 없어 보이는 책들은 자유주의나 기능주의적 시각에서 쓰인 것들이다. 자유주의적, 기능주의적 사고 체계에서는 입장, 관점, 시각 같은 개념 자체를 부정하고 중립성과 객관성을 지향한다. 이런 탈정치적 주장이 가장 정치적인 법이다. 게다가 정치성을 표방하는 경우보다 정치적 효과도 크다.
23 지적 자극의 본질적 측면은 요동하는 세계관이다. 아는 방법을 질문하는 책. 건물(사물, 세계, 인식 대상)이 있다면 조감도는 글자 그대로 하늘에서 새가 날면서 본 모습이다. 하늘에서! 전체는 존재하지도 않지만, 어쨌든 인간은 비행기를 타지 않는 한 하늘에서 전체를 볼 수 없다. 아니, 비행기를 타도 전체가 보이는 것은 아니다. 조감도는 전경을 볼 수 있다(고 간주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체를 보고자 하는 욕망이 있을 뿐이다.
24 (정희진이 습득한 책 읽기 습관,) 7. 궤도 밖에서 사유해야 궤도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8. 대중적인 책은 나를 소외시킨다. 9. 독서는 읽기라기 보다는 생각하는 노동이다.
25 인간관계에서 '갑'은 원하는 것이 없는 사람, 잃을 것이 없는 사람, 덜 사랑하는 사람일지 모르지만 권력이 두려워하는 인간은 분명하다. 세상이 넓다는 것,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이다.
<좁은편력> : 모든 페이지를 다시 읽고 또 읽고 싶다.
32 대학에 가서도 집안일과 아르바이트에 시달렸지만 언젠가! 나는 24시간 책만 읽는 사람이 되리라, 그게 진짜 삶이라고 생각했다. 삶의 너머에 삶이 있어서, 지금 내가 사는 삶은 임시일 뿐이고 아무것도 갖지 않고 책만 읽는 것이 진짜 삶이라는 생각으로 현실을 버텼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평범한 대학생은 아니었다.
33-34 엄마와의 오랜 불화, 어렸을 적부터 느껴 온 이유 모를 심란함(우울), 제대로 해보지 못한 연애, 자의식과 자존심의 불일치, 착하지도 않는데 착한 척 하느라 진을 뺀 일상생활.... 그간의 내 인생이 '간단히'해석되었고 그동안 읽었던 모든 책들이 비로소 어떤 맥락이었는지 감이 잡혔다. '아버지'로 불리는 수염 난 백인 남자의 업적은 만들어진 것(조작)이구나. 그들은 최소한 몇천 년간 여성이 폭력당하는 현실에 대해서는 무지했고 침묵했다. 무엇이 정의이고 진리인가. 지식은 약자의 편이 아니구나.... 그리고 특히 원인 모를, 그러나 집요한 열등감이 사라졌다. 나는 갱생의 의미를 진짜로 알게 된 것 같았다. 사람은 여러 번 태어날 수 있다. 나는 겁이 없어졌다. 그리고 세상을 철봉에 매달려 거꾸로, 아주 멀리서, 아래서, 혹은 눈을 감고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기존의 권위에 주눅들거나 주류에 대한 욕망도 우스워졌다. 지금 생각하면, 여성학 책을 읽으면서 그간 억눌렸던 존재감이 두서없이 분출해서 매일 혼자 무엇인가를 선언하는 식으로 살았던 것 같다. 누구랑 논쟁해도 이길 자신이 있다는 황당한 상상에서부터 내가 앞으로 읽을 책과 쓸 책을 망상하면서 가슴이 뛰었다. 나는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 나는 다른 방식으로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회 밖으로 튕겨 나간다 해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옥살이를 한다고 해도 겁나지 않았다. 왜? 나에겐 책이 있으니까. '언어가 있으니까!'
36-37 책을 읽은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습득이고, 하나는 지도 그리기이다. 전자는 말 그대로 책의 내용을 익히고 내용을 이해해서 필자의 주장을 취하는 것이다. 별로 효율적이지 않다. 반면 후자는 책 내용을 익히는 데 초점이 있기보다는 읽고 있는 내용을 기존의 자기 지식에 배치(trans/form 혹은 re/make)하는 것이다. 습득은 객관적, 일방적, 수동적 작업인 반면에 배치는 주관적, 상호적, 갈등적이다. 자기만의 사유, 자기만의 인식에서 읽은 내용을 알맞은 곳에 놓으려면 책 내용 자체도 중요하지만 책의 위상과 저자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려면 기본적으로 사회와 인간을 이해하는 자기 입장이 있어야 하고, 자기 입장이 전체 지식 체계에서 어떤 자리에 있는가, 그리고 또 지금 이 책은 그 자리의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를 파악해야 한다.
38 책 속에 진리가 있다는 말은 역사 최대의 거짓말이다. 책 속엔 아무것도 없다. 저자의 노동이 있을 뿐이다. 굳이 말하자면, 사상에서 이데올로기('거짓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담론이 있다. 저자의 입장을 수용하고 이해하는 것보다 저자와 갈등적(against)태도를 취할 때 더 빨리, 더 쉽게,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같은 책을 한 번 읽은 사람이, 여러 번 읽은 사람보다 내용을 더 잘 파악하고 더 뛰어난 논쟁력을 갖는 경우도 이 때문이다. 이런 능력은 책읽기는 물론 사고방식 훈련을 해야 키울 수 있다. 쉽게 말해, 늘 고민거리가 많고 잡념이 많고 관찰력이 풍부하고 문제의식이 많은 사람이 있다. 사실, 이런 사람은 공부, 사업, 사회운동 무엇을 해도 잘하는 유형이다.
<1장 고통>
46-48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그날_이성복) 흔히 "압축적 성장"으로 불리는 우리 근대화에 대한 나의 이미지는 '돌진'이다. 목표가 너무 간절해서 신앙으로 승화된, 생각이라면 질색하는, 어떤 힘센 사람이 앞에 걸리적거리는 것은 모두 밀어내며 전진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슬픔이나, 아픈 사람은 짜증 차원을 넘어 '방해', '억압'으로 느껴질 것이다.
52-55 경험한 나, 말하는 나(수신확인, 차별이 내게로 왔다_인권운동사랑방 엮음) 나는 증언 형태의 책을 읽을 때 말하는 사람의 갈등을 가장 주의깊게 살핀다. 이 갈등을 최소화하려는 실천이 민주주의다. 이 책, "이야기를 기다리는 이야기"는 정치적, 문학적, 윤리적으로 말하기와 듣기의 모범이다. 말하는 사람은 차별 경험을 본질적 자아로 환원하지 않으며, 듣고 쓰는 12명 저자들의 지성과 성찰은 안쓰러울 정도로 치열하다. 내용은 '슬프지만' 방식은 독자를 위로한다. 앎과 삶을 위해 필독을 권한다.
59-62 한미 연합군이 강정을 침공했다, 이 말은 국보법 위반일까(순이삼촌_현기영) 한반도에서 베네딕트 앤더슨의 "민족(국가)은 상상의 공동체"라는 주장은 늘 논쟁거리지만, 내 생각엔 엉뚱한 논란이다. '상상의 공동체'는 민족이 관념인지 실재인지에 관한 이슈가 아니다. 민족은 상상의 산물이기에 민족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래서 매우 위험하다는 것이다. 사회가 어디까지를 국토로 상정하고 누구를 구성원으로 상정하는가, 이 유동성 때문에 누구든 언제든 국민에서 배제(포함)될 수 있다. 국민의 개념이나 국경이 확실해서 누구나 보호받으면 좋겠지만 (인류 역사상 그런 적은 없다), 그 경계가 임의적이니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63-65 태어나서, 죄송합니다(이십세기 기수_다자이 오사무) 처음 이 말을 접했을 때 놀랐다. '자기가 태어났고' 그래서 '죄송하다'니.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에 죄송하다는 메시아적 죄책감. 이 어마어마한 자의식과 이를 따르지 못하는 자신. 근대 주체성의 위태로운 산정, 지식인의 자의식은 그를 서서히, 낭만적으로 살해했다. 의제는 "태어나서 죄송하다."가 아니라 "사람같이 살지 않으면 어때요."다. 자살 욕구가 증상인 우울증 환자를 제외하면, 자살은 '사람답게'의 기준이 무엇인가에 대한 각자의 판단에 달려있다. 그는 유서에 "소설 쓰기가 싫어져 죽는다."고 했다. 실연, 빚, 외로움, 망국, 사회주의 붕괴, 축구 팀 패배, 입시...... 이 모든 것은 개인의 인생관과 처지에 따라 죽을 이유가 된다. 재능이 없다고 자살하는 것은 '한가한' 죽음이고, 생활고로 죽는 것은 '절실'한가? 현실의 다급함 정도가 자살을 결정한다는 것은 아니다.
66-68 아무 인사도 없이(파이이야기_얀 마텔) 인간이 급격히 외로워진 시기는 의미, 이성, 역사주의 따위를 앞세워 자연을 공격하면서부터다. 그나마 인간 중에서는 선하고 지혜로운 파이. 그의 일부, 파커가 아무 인사도 없이 떠났다. 사람은 인연 덕분에 산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 스스로 부여한 의미일 뿐 자연은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 최대치의 관심이라고 해봤자 '너희는 지구의 재앙이야'. 문명 대 자연? 이런 문법은 없다. 우리는 인식 대상에 그렇듯 자연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안다고 생각하는 부분만 알 뿐이다. 있는 그대로의 '스스로 그러한' 자연은 없다. 우리가 말하는 자연은 인간이 추구하고 투사하고 개입한 문명의 또 다른 얼굴로서 자연(cultured nature)이다. 그 중 가장 믿을 만한 자연은 인간이 만든 신이 아닐까. 배신감! 나도 그 장면에서 울었따. 삶이란 나는 남고 내게 의미있는 관계자들을 떠나는 과정이다. 시간은 그들을 태우고 멈추지 않고 나를 앞지른다. 건강, 능력, 기억, 사람, 중독.... 이들을 제때, 제대로 떠나보내지 못할 때 몸에 남아 병이 된다. 미련과 후회, 그리움이 지나치면 '떠나보내라'고들 한다. 사실 그러고 말 것도 없다. 그들은 혼자 간다. 존재하지도 않는다. 떠났으니까. 물론 인간은 무의미 속에서도 살지 못한다. 다만, 탐욕스러운 데다 멍청하기 까지 한 호모 사피엔스의 월감이 만고의 근원임을 알아야 한다. 인간이 지구의 유일한 인식자(knower)라는 생각은 스스로 만든 방상이다. 백번 양보해서 '생각하는 동물'이면 뭐하나. 문제는 무엇을 생각하느냐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찰나를 사는 먼지다. 파커 덕분에 내 인생의 중대한 몇몇 관계자들을 떠나보냈다. 고열과 구토를 동반한 감기가 세리머니를 대신했다. 오랜 세월 나를 괴롭혔던 의미 있는 삶에 대한 강박은 다소 사그라졌지만 여전히 서러움이 가시질 않는다. 이 아침 무거운 몸을 일으킬 이유를 찾아야 한다. 파이, 파커! 어쩌면 좋겠니.
75-77 벼랑에서 만나자(지금은 비가..._조은) 남의 시로 연애 편지를 대신하는 이들처럼 이 시가 내 인생이었으면 좋겠다 그녀의 첫 시집 <사랑의 위력으로>에 처음 등장하는 <지금은 비가...>는 시집 전체를 운명 짓는다. 서른 즈음에 어떻게 이런 언어를! 차갑고 뜨거운 전율이다. "벼랑에서 만나자. 부디 그곳에서 웃어주고 악수도 벼랑에서 목숨처럼 해 다오. 그러면 나는 노루 피를 짜서 네 입에 부어줄까 한다./ 아, 기적같이/ 부르고 다니는 발길 속으로/ 지금은 비가...." 벼랑에서 만나기를 원한다. 삶 자체가 벼랑의 선택이다. 사방이 배수의 집이다. 건조한 용어로, 포지션이다. 우리가, 각자가 사는 자리다. 의식하지 못하거나 피할 뿐이다. "허무하다.", "인생 별거 있어?" 이 흔한 타령은 별아에 살고 있음을 잊은 대사다. 벼랑은 경계이기도 하다. 확실한 곳이 아니다. 남의 기회에 몸을 맡긴 이들은 비용을 치르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회색인"이라고 외친다. 이런 이들을 보면 "회색은 회색이 아니에요!"라고 쥐어박고 싶다. 회색은 뚜렷한 (정치)색이다. 벼랑에 살다 보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벼랑을 경멸하는 자, 벼랑으로 몰릴까 봐 못 본 체 지나가다 넘어지는 자, 친한 척 다가와 벼랑만의 경험을 인터뷰하는 자, 그저 벼랑에서 함께 살자고 하는 자, 벼랑을 파괴하고 공사판을 벌이는 자, 벼랑에 매달린 손을 밟는 자..... 물론 그곳에서 웃어주고 악수도 목숨처럼 나누며 노루 피를 부어주는 이들이 훨씬 많다. 벼랑을 긍정하면, 고통스러운 삶을 받아들이고 나를 서럽게 한 사람일지라도 다시 믿어보며 억울한 사회를 살아갈 힘을 얻는다. 상대가 누구든 그 순간만큼은 최선을 다해, 집중하고, 절실하게 만났으면 한다. 그렇게 마음을 다하고 회자정리를 안아버리면 '어디에 가서 돌이 되어 바람을 굴절시키는 단 한사람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제도(가족주의, 동창회...)적 관계만 안전하다고 믿는 사람들과 계층별 유유상종이 아닌 만남은 시간 낭비를 넘어 모욕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스스로 격자에 갇힌 것이다. 이해 관계든 진실한 관계든 어차피 모든 관계는 오래가지 않는다. 영원한 관계는 두 사람이 동시에 동작을 멈추거나 끝없는 자기 갱신의 매력이 교환될 때 가능하다. 전자는 죽는 것이고 후자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끔찍한 관계를, 제도의 천막으로 대충 가리며 산다. 외로움은 이 풍경의 상처다. 인맥 관리, '밀당', 포커페이스.... 몸 사리고 계산해봤자다. 남김없이 준다고 해서 바닥나는 마음은 없다. 인간이 바닥을 드러낼 때는 따로 있다. 그러니, 목숨처럼 해 다오.
81-83 죽음의 공포는 고통의 공포보다 크지 않습니다(죽음은 내게 주어진 마지막 자유였다_라몬 삼페드로) 현대 의학은 인간을 고통에서 구원하기도 했지만 생명의 범위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생명보다 가치 있는 것은 없다? 문제는 어떤 생명인가이고 생명이 삶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죽음은 삶의 끝일 뿐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을 뿐이다. 사후 세계에 다녀온 사람은 없다. 죽음이 어떤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에 비해 삶의 고통은 너무나 생생하다. 바로 우리 곁에서 경험하고 잘 아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구체적인 고통보다 관념적인 죽음의 공포에 압도된다. 타인의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은 피하고 싶은 엄청난 노동이다. 체제는 이러한 현실을 "신의 뜻", "생명의 소중함", "남은 사람의 고통" 등 엉뚱한 언어로 포장한다. 신은 감당할 수 있는 고통만을 주신다? 그러시겠지. 그런데 왜 감당해야 할까? "물질아, 어디가니?/ 의미를 찾아가는 중이야/그럼 왜 의미 없는 고통을/ 그냥 받아들이니?"(라몬이 남긴 시, <어디 가니?> 중에서)
<2장 주변과 중심>
90-92 여자가 되는 것은 사자와 사는 일인가(고정희 시전집1,2_고정희) 구조와 개별 남성이 변해야 하는데, 남성성으로 조직된 가족, 사회, 국가, 시민사회가 먼저 변할 리 없다. 누리는 자 입장에서는 지금 상태가 좋고 성 차별은 어디서나 '상식'과 '미풍양속'으로 합의되기 때문이다. '사자'의 자신감은 자기들은 칼자루를, 여자는 칼날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이 변할 수 밖에 없는데, 여기서 시인은 고뇌한다. 이때 변화는 저항이 아니라 자기 채찍질이다.
93-95 "내게 설명해줘!"(이별의 기술_프랑코 라 세클라) 나의 소원은 인류 멸망이다. 내 소원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즉사'는 모든 사람의 희망일 것이다. 두 소원의 공통점은 시간 차가 없다는 것, 즉 고통이 없다. 사랑하는 사람과 내가 동시에 사라져야 이별을 피할 수 있다. 한창 연애할 때 '손 잡고 같이 죽자'는 맹세는 얼마나 흔한가. 고통 없이 죽고 싶은 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모든 비극은 경험의 시간 차에서 온다. "너는 아직도 그러고 사는구나, 사랑은 그런 게 아냐. 사랑한다, 사랑했다. 이게 서로 반대야." 상대에게 떠난 이유를 따지는 것은 전혀 효과가 없다. 사랑이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실리 측면에서도 그렇고, 사실 진짜로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심오하지 않다. '피해자'에게 관심도 없다. 관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쪽이 약자가 될 뿐이다. 그들은 단지 할 수 있으니까 그런 것이다.(They do because they can.) 인간은 누구나 그들이 될 수 있다.
-
읽고 또 읽고 싶은 문장의 연속이다. 도서관에 반납하고 서점에서 사야겠다.
'a book lov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에게 기술이란 무엇인가 / 송성수 편역 (2) | 2017.03.01 |
---|---|
2017년 2월 셋째주 대출 (0) | 2017.02.13 |
지중해 철학기행 - 에페소스 | 헬레니즘 시대의 학문과 근대 / 클라우스 헬트 (0) | 2017.01.20 |
대통령을 꿈꾸던 아이들은 어디로갔을까 / 오찬호 (0) | 2017.01.18 |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 - 외롭지 않은 페미니즘/ 이민경 (0) | 2017.0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