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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16-117 솔직히, 그런 책을 돈주고 사서 한 장 한 장 읽어봐야 '팔자 좋다'는 식의 눈총만 받을 뿐이다. "저 애는 취업 포기했나봐."라는 소리를 듣기에 안성맞춤인 것이다. 대학생이 도올에게 무감할 수 밖에 없는 구조는 이렇게 완성된다.
p.144 대학과 '기업', 총장과 'CEO'는 어색한 조합일 수 있지만, 지금은 명예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렇게 세상은 변했다.
p.146 이런 시대상에 대해 말하면 한국사람들은 세계적인 추세니까 어쩔 수 없다며 체념하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사실 한국만의 특수한 상황이 아니기에 더욱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시대의 조류인 변화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면 이 문제는 개인이 정신을 차린다고 해결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구조적 차원에서 개인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제어할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개인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다.
p.149 학교는 복지기관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기업도 아니다. 그런데 중앙대 총장의 발언을 보면 대학이 어떻게 변했는지 실감할 수 있다. 갈등을 '재정' '효율적' '완전경쟁' '최소비용' 등의 개념으로 해석하고, 경쟁이 사라지면 파업이 빈번해지므로 피해가 발생한다고 생각하는 이 프레임이야 말로 완벽한 기업가 정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p.162 대학이 외부에 손을 벌리면 필연적으로 무감의 구조가 만들어진다. 무감은 공감의 부재다. 공감은 무엇을 알아야만 할 수 있는 것이다. 기업에 대한 비판 자체가 봉쇄되면, 기업을 비판하는 말이 나와도 그게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공감이 없으니 비판은 파편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문제를 알고있으면서도 애써 외면하는 것과는 수준이 다르다. 지배당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피지배자들은 그렇게 탄생한다.
p.189 대학은 '무감'을 만들어내는 곳이기 이전에 '무감' 그 자체다. 공감해야할 것은 단 하나, 바로 '돈'이다. 돈이 흘러가는 곳에, 돈이 나오는 곳에 코를 박아야 한다. 대학 스스로 기업에 머리를 숙였다. 몇몇 정량화된 지표에 근거하는 대학평가가 대학의 브랜드 가치를 결정하자, 대학은 먹어서는 안될 옥수수사료를 꾸역꾸역 먹으며 '환상의 마블링'을 만들어냈다. 처음에는 대학이 기업의 하소연을 귀담아듣는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대학 스스로가 기업정신으로 철저히 무장하고 있다. 이 짜증나는 공간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적응하는 것 뿐이다.
p.208 지금의 대학 교육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답정너'다. "답은 정해져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돼." 이것이 교육의 전부다. 의심은 사라진다. 분석은 요원하다. 주어진 환경에 익숙해지는 것만이 살길이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용기는 무모함으로 여겨진다. '답정너'는 '동질화'를 확장시키기도 한다. 외우면 된다의 전제는 답은 정해져있다 이다. 그래야만 완벽히 외울 수 있다.
p.231 이와 같은 학문의 내적 다양성 소멸은 필연적으로 사회 전체의 '공감능력'을 퇴보시킨다. 그러잖아도 대학에서는 경영학의 영역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리고 인문사회영역은 그만큼 축소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학문의 내적 다양성마저 사라진다면 우리 사회는 어떻게 될까? '다름'을 이해하는 힘이 없어지면 사회 전체가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진다.
p.244 한국에는 오직 취업만을 목표로하는 맥도날드 대학 뿐이다. 그렇기에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어디에나 유사한 공기가 흐른다. 그리고 여기서 탄생한 '죽은 시인'들이 우리 사회에서 공적 의사결정을 하게 될 것이다.
p. 248 대학은 교육릴레이의 마지막 주자다. 애초의 목적을 잃어버린 경주이지만 마지막주자는 포기하지 않고 결승선을 향해 보란듯이 진격한다. '무감'을 만들어내고, '영어'를 숭배하고, '돈'만 되면 무엇이든 하고, '비판'을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하는 대학에는 고통을 고통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이는 주술만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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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격의 대학교를 읽었다. 작년엔 기업가의 방문도 읽었다. 나는 대학에 왜 다녀야 하는가 물음이 생겼고, 휴학했다. 휴학하는 동안 대학에는 평생 발도 들이지 않을 사람들과 일했다. 일했다기 보단 생활했다. 함께 놀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그들은 대학에 발 들이지 않은, 않을 사람들이기에 그 생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끝까지 그들과 나는 다른 사람임을 깨닫고 말았다. 나는 고민했다. 내가 이 사람들과 함께 하지 못하는 이유는 계급일까. 지식에 있어 학문에 있어 내가 계급을 나누고 있어서일까. 그들은 아무 생각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부터가 나에게 뿌리깊은 엘리트주의가 있다는 것일까. 고민이 되었다. 그러다 내가 인정해야만 하는 사실들이 있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내가 아무리 그들과 함께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이유. 나는 대학생이라서. 정말 단순하고 간단한 사실 이었다. 나는 어차피 어떻게 발버둥을 쳐도 대학생이다. 그것도 정부주도 대학평가에서 A등급을 받은 (비록 하위권이지만) 학교의 대학생이다. 그 위치에 서서 어떻게 그들과 같아지려 할 수 있었을까. 내가 있는 자리에서 내가 해야할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과는 다른 나만의 일. 그들이 아무리 나를 욕한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아니 그들은 나를 욕할 자격이 없다. 그들 또한 그들의 자리에서 그들이 해야하는 일을 해야한다. 지금처럼 그렇게 놀고 먹는 일일지라도 해야만한다. 위치가 다르다. 높고 낮음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존재한다. 자리라는 것. 그리고 내가 지켜야만 하는 것. 나는 대학생이다. 그지같은 학교라고 맨날 비리나 저지르는 학교라고 욕해도 나는 대학생이다.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헬조선이라고 비아냥대고 흙수저라고 나 자신을 자조해도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나의 현실을 바라보고 인정하자.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해야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떠올리자. 데이터 저널리스트 라는 새로운 목표를 만들고도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 지금. 섣불리 발자국을 떼는 것 보다 더 고민하고 내 위치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 고민하고 나아가자. 나와 다른 길을 가는 사람을 폄하하고 깎아내리지도 말자. 그것이 가장 위험하고도 무서운 일임을 알았으니. 그래서 시간표를 짤때도 예전의 설렘이나 두근거림 같은 건 없다. 무슨 공부를 해야하는지. 그 공부로 나는 무엇을 해내야 하는지. 그것 뿐이다. 학교에서 무언갈 배우려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미 그것이 대학의 현실이니. 내가 그 현실을 바꿀 수 없다고 순응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현실을 만들어나가면 될 것. 대학의 수업들은 수업대로 듣고, 내가 할 수 있는 공부는 나 대로 해야한다는 것. 그래서 무감해 지지 않는 것. 그것이 나의 유일한 목표이다. 무감의 대학에서 무감해지지 않도록, 그러면서 내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치열하게 싸우는 것. 너무나 어렵고도 괴롭겠지만 그것이 내가 해야할 일이다. 이제 도망칠 곳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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