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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book lover

자기 결정 / 페터 비에리

 

 

밑줄을 열심히 그으며 짧은 책을 4달 동안 읽었다.

간혹 꺼내 읽고 싶은 책이 될 듯.


 

2021.05.01

 

스스로 결정짓는 삶은 이 규범의 틀 안에서 외부로부터의 강제가 없는 삶, 그리고 어떤 규범을 통용할 것인지의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삶을 말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우리의 의지와 경험이 자신의 개인적 정체성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는 삶의 역사라는 바탕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동시에 삶의 역사가 주는 조건에 의해 제약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나의 생각과 의지와 감정 들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의해 이리저리 튀는 고무공의 신세라면 내가 그것들을 스스로 정한다는 말이 결국 말뿐인 허울이 되는 것 아닌가요? 사고하고 의지를 세우는 존재인 우리가 단순히 강물에 휩쓸려가는 모래알 같은 존재로 전락하는 것 아닐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나의 내면세계가 외부와 아무리 밀접하게 얽혀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의 세계와 또 다른 하나의 세계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합니다.

 

하나는 자신의 사고와 감정과 소망을 주관하여 말 그대로 삶의작가요, 그의주체가 되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사건을 단순히 맞닥뜨리거나당하여 그 일로 인한 경험에 그저 속수무책으로 압도될 수밖에 없는, 그래서 주체가 되는 대신에 단순히 경험이 펼쳐지는무대가 될 수밖에 없는 삶을 가리킵니다

 

그저 맹목적으로 닥치는 대로 살아가거나 되는대로 맡겨선 안 되고 우리 스스로를 테마로 삼아서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것이 우리 인간의 특징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이것은 뒤로 한 발짝 물러나 자신의 경험과 내적 거리를 둘 수 있는 능력입니다.

 

자기 결정은 가능성에 대한 인지력, 즉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필요로 합니다.

 

항상 견지해오던 나의 사고방식에 만족하는가, 아니면 이제 더 이상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진정으로 화려한 삶과 요란한 성공을 좇는 사람인가? 혹시 수도원 같은 고요 속에서 마음의 안식을 얻는 유형은 아닌가?

 

자아상은 우리가 어떤 모습이고 싶은가에 대한 생각입니다. 지금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의 삶이 내적으로 그리고 외적으로 우리의 자아상과 조화롭게 어울릴 수 있을 때, 그리고 우리가 행위와 사고와 감정과 소망에 있어서 되고 싶어 하는 모습의 사람이 되었을 때, 그것을 자기 결정적 삶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바꿔 말하면 자기 결정이 한계에 부딪히거나 실패하는 것은 자아상과 현실 사이에 큰 간극이 존재할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내적 단조로움과의 싸움, 체험과 바람이 변화 없이 굳어버리는 현상과의 투쟁입니다.

 

원하는 나의 모습과 현재의 내가 너무 달라 계속해서 마음의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다면 자아상뿐만 아니라 자꾸만 고개를 쳐드는 그 욕구들의 근원지를 찾아 나서야 합니다.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이 나를 조종하는, 나의 느낌들과 내가 원하는 것들의 표면 밑에서 흐르고 있는 소용돌이를 감지해내는 것이 중요합니

 

그런데 스스로에게 묻는다는 것, 스스로를 이해한다는 것, 변화한다는 것, 이것들은 과연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확실하다고 믿어오던 것들에 대해 긍정과 부정의 증거를 찾아가는 동안 나는 그 확신들이 변화할 수 있는 내적 과정의 문을 열게 됩니다.

 

여기서 과감히 플라톤적 대화의 방법적 기본 사상을 표현해본다면, 문법적으로 잘 만들어진 문장이 전부 어떠한 사상을 나타낸다는 생각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아무 이상이 없지만 사유 면에서 아무런 내용도 없이 오직 잡설에 불과한 문장들이 지천에 널려 있습니다. 이것은 소크라테스가 정의와 의미와 진실 같은 것들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상대방 자신이 무엇에 대해 말하는지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했을 때 드러났던 것이지요. 이렇게 하면 상대방은 대화의 말미에 이르러 전보다 더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되며 익숙하게 사용해왔지만 내용적으로는 빈 화법들에 의구심을 품게 됩니다.

 

그러나 겪었던 일을 말로 표현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파악하고 이해하려고 할 경우엔 다른 결과가 나옵니다. 어떠한 일에 대해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문하며 그동안 틀림없다고 확신하던 생각에 대한 증거들을 다시금 살펴볼 때, 그것이 검사대에 오르고 테마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그 확신에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고 느낀 경험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우리가 느끼고 바라는 많은 것들은 우선 우리 자신에게조차 혼란스럽고 불투명합니다.

 

 

2021.05.04

 

일단 인식된 경험을 세분화하고 구체화하는 것,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의식되지 못한 것을 의식화하는 것, 이 두 가지 방법은 우리가 언어적 발현을 통해 우리의 감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자기 결정의 적용 범위를 내면으로 확장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2021.07.19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와 표현이 허공에 울리는 메아리에 그치지 않고 내적 구조까지 변경하는 이러한 과정을 다르게 표현한다면, 자기표현 과정을 통해 개인적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작업을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 하나의 에피소드는 이야기의 일부분으로 기억되니까요. 그래서 무언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경험된 과거를 스스로와 타인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뜻할 때가 많습니다.

 

기억하는 존재로서의 우리는 자기 결정적 존재가 아닙니다.

 

이해되지 않은 현재의 힘은 비록 강력할지 모르지만 우리로 하여금 말할 기회를 주지 않기 때문에 위협적이고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우리와 직접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는 집중적 현재는 이해될 수 있고 서술 가능한 현재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결정을 가르치는 학교가 있다면 그곳에서는 현재를 잘 느끼는 방법 또한 배울 수 있다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문학작품을 읽으면 사고의 측면에서 가능성의 스펙트럼이 열립니다. 인간이 삶을 이끌어나가는 모습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가를 알게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질문의 답은 오직 여유로운 가능성의 장 안에서 여러 가지로 입장을 바꿔보는 정신적 활동을 할 때에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해 좀 더 길고 복잡하게 서술하는 것은 긴 호흡과 하나의 구조가 필요하기에 그보다 더 어렵습니다. 문학이, 아니 오직 문학만이 우리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절정을 향한 드라마적 전개이며 이 부분이 자아상의 핵심을 조명하는 것입니다

 

문학적 글쓰기는 말에게 그것이 가진 원래의 의미와 시적 힘을 되돌려주려는 노력입니다.

 

그러므로 타인의 시선과의 대결이 자기 결정적인 성질을 띠려면 자기가 누구인지 끊임없이 묻고 또 묻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에 대항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며 깨어 있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사물을 서술하는 데에 이 방식이 정말로 옳은 방식인가?내가 생각하며 느끼는 방식과 정확히 일치하는가? 막강한 권위에 의해 제정된 요란한 공식이 띠는 당위성이 지극히 당연하게 다가올수록 우리는 더욱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야 합니다.

 

다른 이가 먼저 살아가고 먼저 이야기한 것을 그대로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이 가르치는 논리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지요.

 

자기 자신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기, 각자 차별화된 자아상 만들어가기, 그 자아상을 마지막 순간까지 끊임없이 새롭게 고쳐나가며 발전시키기, 자기 인식을 넓혀가기, 자신만의 생각과 감정과 기억을 갈고닦기, 소리 없이 이루어지는 타자의 조종을 명료히 꿰뚫어 보고 방어하기, 그리고 자기 목소리 찾기

 

이런 행위를 할 때에도 그 행위를 통해 어떠한 의지가 표출되는지, 그리고 그 행위가 우리 자신과 우리 삶에 어떻게 어울리는지 잘 알고 있을 때만이 계속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나 사건에 대해 가지는 감정에 대해 알려면 그 맥락과 상황 안에서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감정과 사고와 바람이 처음으로 태어났을 시기, 즉 과거로의 반추가 필요합니다. 나는 나의 경험들 안에서 어떻게 지금의 내가 되었는가? 그중 특정한 요인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는가? 트라우마가 있었는가? 어떻게 하나의 경험이 또 다른 경험으로 발전되었는가? 나의 사고와 경험 가운데 서로가 일치하는 것과 모순되는 것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즉 감당하기 너무 버거워서 자기 자신에게조차 숨기고 의식 저편 깊숙한 곳에다가 묻어두어야만 했던 과거의 실수나 과오에 어떤 것이 있는지 처음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자아 검열의 힘을 꿰뚫어 보고 나면 그 힘에 대항하는 방법을 강구할 수 있고, 새로운 행동을 삶의 받아들일 만한 한 부분으로 인정할 수 있습니다. 한발 더 나아간 새로운 인식의 방식에 도달한 것이지요. 자기 인식은 이런 방법으로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우리는 자기 인식을 통해 자신의 개인적 정체성을 갈고닦습니다

 

 

2021.08.22

막스 프리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글을 쓰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어떤 사람이 아닌지조차 알지 못한다.”

 

다시 풀이하면 자신이 누구인지표현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기회를 놓친다는 뜻입니다

 

문학적 텍스트는 경험을 예술적으로 나타내는 언어적 표현입니다.

 

2021.08.31

자신만의 언어를 통해 어떠한 길을 밟으면서 살아왔는지 떠올리는 것, 이것 또한 자기 인식의 한 형태입니다.

 

자기 인식은 자유의 원천이며 따라서 행복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자기 인식의 요소 중 하나는 자기 삶의 시간과 자유로운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어떤 힘이 나를 조종하는지 알아내지 않으면 사물을 바꿔볼 기회는 영영 오지 않아요.

 

다시 말하면 내가 그 사람에게 투사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꿰뚫어 보는 것이지요. 그리고 반대로 나에 대한 타인들의 투사를 알아차리고 그들의 희생양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일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021.09.02

우리는 언어의 낯섦에서 다른 정신의 낯섦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범주와는 다른 범주, 행위와 관습을 서술하는 다른 방식, 자신과 타인의 경험을 언어화하는 다른 방식이 존재함을 보고 이를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묻습니다. 지식이란 과연 무엇인가? 단순한 의견과 지식은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진실이란 무엇인가? 세계는 우리의 의견을 어떤 의미에서 맞다고 또는 그르다고 하는가? 그리고 진실이 중요한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삶의 대부분 동안 타인의 시선을 받으며 살아가는데,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은 우리가 이 시선을 어떻게 경험하는가, 또 어떤 식으로 대면하는가 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어떤 문화를 이해하거나 배우려고 할 때에는 그 문화에서 자기 결정과 자유가 어떻게 이해되는지, 그리고 그들에 대한 경험이 어떤 무게를 갖는지 반드시 스스로 물어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식된 대안을 통해 마침내 이렇게 말하는 자신의 목소리에 이르게 되지요. “다르게 볼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나 나 개인적으로는, 존엄성과 자유가 있는 삶 속에서 나는 다른 방식이 아닌 내가 보는 바로 그 방식으로 이해한다.”

 

자기 삶의 의미는 각자가 만들어내며 자신의 정신적 삶의 논리에서 도출되고 또한 언제든지 변화할 수 있으며, 이러하거나 저러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의미와 행복과 중요성에 관한 한 우리는 우리 위에 있는 존재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이에요. 책임은 오직 스스로, 그리고 타인에 대해 질 뿐입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우리는 문화적 공간의 요소들에 우리를 비춰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것들에 자신을 동일시하거나 경계를 짓지요

 

문화적 존재에 있어 특별한 점은 그 자신이 항상 새롭게 화두가 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