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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온라인 선공개 했을 때 신나게 읽었었는데, 정작 본 책은 끝까지 읽지 못했던 장강명의 첫번째 에세이!
책방 모임 때 우연히, 고요서사에서 장강명 책을 보았고 같이 간 C 와 장강명 찬양을 하다가 이 책이 불현듯 떠올라 빌렸다.
그리고 빠르게 읽어나갔다. 나의 고민에 실마리를 주기도 했고, 위로가 되기도 했고, O의 말처럼 덕분에 덜 외로워지기도 했다.
1.
그러나 애완 인간이었다. 희고 고운 피부 아래, 순하고 눈망울이 여린, 바들바들 떨고 있는 소형견이 들어 있었다. 그런 애완 인간임이 분명한 변호사도 한 명 안다. 스펙은 좋지만 속은 비어 있다. 자기 인생을 살지 못하는 인간들이다. 신자유주의가 어쩌고 시민 불복종이 어쩌고 코스프레를 하지만 시누이에게는 입도 뻥긋하지 못하는 겁쟁이들. 추상적인 적을 상대할 때에만 저항 정신을 열변할 수 있는 비겁자들. 그래서 자꾸 거대한 상상의 적을 만들어내는 음모론자들. 교수, 판검사, 의사, 약사, 회계사, MBA, 대기업 직원 중에 그런 애완 인간들 많을거다. 요즘 한국에서는 애완 인간으로 살아야 그런 직업을 가질 확률이 높아진다. 자기 돈으로 미국 유학을 가거나 로스쿨 학비를 댈 수 있는 20대가 몇이나 되나.
2.
나를 향한 부모님의 사랑이 잘못된 거인가? 부모님의 판단이 그른 것인가? 사랑 자체야 뭐 그리 잘못되었으랴. 내가 들개 같은 기질로 무모한 시도를 벌였던 것도 사실이다. 기자가 되겠다고 깝죽대다 실패하고 남들보다 1,2년 늦게 엔지니어의 삶을 살았을 수도 있다. 전업 작가 한다고 설치다 돈이 떨어져 이름 없는 주간지 기자로 재취업하거나 홍보 업계로 빠졌을 수도 있다. 외국에 있는 여자친구를 기다리다 배신당하고 혼기를 놓쳤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살았어도 시시한 삶이었을 건 분명하다. 모든 게 거짓말처럼 잘 풀렸다면 (...)
-> 그가 뒤에서 말하는 '평행우주의 나'의 비교도 이와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내가 행복을 얻는건 남의 불행으로부터가 아니라는 말은, 내가 며칠 전 어떤 세상을 바라냐고 물었을 때 했던 대답과도 비슷했다. 나는 다양성이 존중되는 세상을 바란다고 말했다. 같은 옷을 입지 않아도, 같은 머리스타일을 하지 않아도 그 누구도 비난 받지 않는 세상. 나의 행복이 누군가에게 불행이 되지 않는 세상, 또 누군가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되지 않는 세상. 사랑이 비웃음 거리가 아닌 세상, 사랑을 모두가 소중히 여기는 세상을 바란다고 했다. 이 세상속에서 나는, 행복을 얻게 된다면 작가가 말한 것 처럼, 누군가의 불행으로 말미암은 행복이 아닌, 다른 세계를 살고있는 또 다른 나, 다른 선택을 한 또다른 나와의 비교에서 행복을 얻어야 할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와 대결하는 것이, 눈에 보이는 세계와 대결하는 것보다 덜 고통스러울 지도 모른다.
3.
아마 정체성 문제에 관한 한, 한국인들이 정신적으로 허약해서라고 생각한다. 자기 삶의 가치에 대해 뚜렷한 믿음이 없기에 정체성을 사회적 지위에서 찾는 것이다. 사회적 지위는 대학 간판이나 자식 결혼식장에 모인 하객 수로 구체화된다. 그래서 다들 거기에 집착한다.
-> 나의 괴로웠던 어느 밤을 달래주었던 문장.
4.
무슨 생각을 하건,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의 마음을 피로하게 만든다. 생각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대신 괴로움에 빠뜨린다. 이것이 선악과의 정체다. 생각은 현실을 넘어선 허구를 상상하는 능력이다. 생각 덕분에 우리는 애국이니 박애니, 살을 비비며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사랑을 넘어선 거대한 사랑을 상상한다. 구원이니 해탈이니, 근육의 나른함과 위장의 포만감을 넘어선 거대한 행복을 상상한다. 계급이니 국가니, 내가 표정을 확인할 수 있는 사람들을 넘어선 거대한 집단을 상상한다. 그리고 그런 거대한 허구를 상상하기 때문에 우리가 거대한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거대한 행복을 얻지 못했으며, 거대한 집단 속에서 소외되었다고 여기게 된다.
5.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거지?'
마음 한 구석에서는 이 모든 사태가 경악스럽기만 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마음의 또 다른 한 부분에서는 HJ가 하는 말을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어떻게 상대방을 굴복시킬지를 궁리하고 있었다.
6.
우리가 물 밑에 들어갔다 나온 뒤 한동안 말이 없었던 이유는 수면 아래가 정말로 처음 보는 세계였기 때문이다. 신세계를 체험하면 새로운 감각들에 뇌가 놀라게 되고, 익숙한 구세계를 달리 보게 되고, 신세계의 영토만큼 넒어진 머릿속 세계지도에서 자신의 위치를 다시 찾게 된다.
어릴 때는 그런 일들이 매일 일어났다. 하루하루가 열광과 감탄, 발견과 깨달음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10대가 되고 20대가 되자 신세계라고 할 정도의 새로운 경험이 확 줄어들었다. 진짜 새로운 경험은 많지 않다. 첫 비행은 대개 비행기 좌석에 안락하게 앉아서 경험하기 마련이고, 그 경험은 (...)
그러나 신세계를 찾는 것 자체가 목표가 될 수 있을까? 끊임없이 직업을 바꾸고, 분기마다 새 취미에 열정적으로 도전하며, 어딘지 모를 이상향을 찾아 쉴 새 없이 떠돌아다니는 삶이 바람직한 걸까? 그걸 낭만이라고 포장하는 건 시시한 사기 아닐까. 그것은 기실 그 사람의 세계가 그만큼 황량하고 별 볼 일 없음을 폭로할 따름이지않은가. 어느 정도 날씨가 괜찮고 마실 물과 식량이 있는 평평한 땅을 찾으면 방랑을 멈추는 게 정상이다. 거기에 건물을 짓고 사람을 불러 모아야 한다.
7.
"나중에 후회하지 않겠어? 지금이야 자식 없는 게 홀가분하고 좋을지 몰라도 나이가 들면 어떨지 몰라. 그때 가서 다 큰 자녀를 갑자기 입양할 수도 없잖아?"
내가 아이를 낳지 않고 살 계획이라고 말하면 그렇게 조언하는 선배들이 있었다. 글쎄? 나는 그런 조언들은 모두 손쉽게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부모가 아닌 상태로 늙는다는 것도 이전에 내가 해왔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경험이다. 부모로 사는 사람은 부모가 아닌 사람이 자녀 양육에 쓰지 않은 에너지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어떤 가능성을 펼칠 수 있을지 결코 알 수 없다. 자녀를 낳은 걸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다. 지금이야 아이들이 귀엽고 사랑스러울지 몰라도 나이가 들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때 가서 다 큰 자식을 갑자기 내 자식 아니라며 내칠 수도 없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좀 더 영적인 문제였다. 만약 신이 존재하고, 영혼이라는 것도 있고, 삶에 성스러운 의무라는 게 있다면, 그 성스러운 의무는 이런 것 아닐까. 다른 사람을 네 목숨보다 더 깊이 사랑하라.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줘라. 그리고 내가 화분에 물이나 주고 있을 때 부모들은 자녀를 통해 그런 의무를 손쉽게 달성하는 것 아닐까.
8.
나는 어릴 때 그런 음악의 좋은 점을 몰랐다. 곡 길이가 10분, 15분을 넘어가고 박자가 두 번쯤 바뀌고, 기타가 미친듯이 빨라지는 대목이 있는 '대곡'들이 최고라고 생각하며 쉽고 달콤한 노래들을 우습게 보았다. 친절한 사람들을 우습게 여기고 허세만 잔뜩 부리고 다녔다.
9.
앰브로즈 비어스는 <악마의 사전>에서 행복을 이렇게 정의한다. '행복 : 타인의 불행을 바라보며 얻는 쾌감.'
글쎄, 나는 냉소적이기는 하지만 공감 능력도 있다. (...)
나는 대신 수많은 평행우주에 있는 장강명을 상상한다. 식사를 한 뒤 사무실에서 졸음을 참으며 바로 오후 업무를 해야하는 장강명. 아니면 너무 바쁘거나 돈이 없어서 제대로 끼니를 때우지도 못하는 장강명.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하지 못한 장강명. 말썽쟁이 자식들에게 시달리는 장강명. 그들의 불행에 대해 생각하면서 나는 행복해진다. 모두 허구이지만, 이 행복감은 실체다. 허구라는 건 정말 굉장하다. 우주 몇십 개를 새로 만들어내는 데에도 별 힘이 들지 않는다.
다만 그런 허구가 제대로 위력을 발휘할면 형식적이면서도 실체적인 종지부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멋진 허구가 개별성을 얻지 못한 채 다른 허구와 섞이고, 흐려지다가 이내 사라져 버린다. '2014년 11월에 나는 HJ와 3박 5일로 보라카이에 신혼여행을 다녀왔는데, 이런저런 교훈을 얻었고, 전체적으로 너무 좋았다'고 매듭을 지어야 한다. 그래야 그 사건이 하나의 이야기로 설 수 있고, 이후의 다른 사건들이 그 이야기에 침입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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