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과학자들, 고대에서 이성의 시대까지>
18p. 라부아지에 부부는 모두 체포되었다가 마리는 이듬해인 1794년 풀려났지만 남편 라부아지에는 끝내 단두대에서 처형을 당했다. 풀려난 마리는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 가면서 1792년부터 시작한 남편의 연구를 편집하고 최종적으로 정리해서 책으로 출간했다. 이러한 마리의 노력이 없었다면 라부지에의 연구는 빛을 보지 못한 채 영원히 묻히고 말았을 것이다.
19p. 여성 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사고는 1800년대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교육조차 주로 여성을 우아한 동반자나 좋은 어머니로 만들기 위한 기본적인 교육훈련에 불과했다. 따라서 종교단체에서 운영하는 기본적인 교육은 권장했으나 미국과 유럽은 물론 심지어 이탈리아에서조차 대학은 여성에게 개방되지 않았다. 여성은 '지적으로 열등한 존재'라고 인식되었기 때문에 여성교육은 돈과 시간의 낭비로 간주됐다. 뿐만 아니라 많이 배우는 것은 여성의 건강에도 해롭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었다.
27p. 베일리 부부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공무원인 남편 베논이 서부의 포유동물과 파충류, 각종 식물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위해 출장을 갈 때마다 플로렌스도 늘 같이 갈 수 있었다. 플로렌스로서는 조류를 관찰할 수 있는 너무나 좋은 기회였다.
86p. 지진과 불로 소중하게 간직했던 식물표본집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지만 앨리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과학기술지 <사이언스>에 기고한 글에서 그녀는 담담하게 썼다. "나의 일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러나 슬퍼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일을 하는 동안 나는 즐거웠고, 또다시 그 같은 즐거움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시작했다. 독학으로 훌륭한 식물학자가 된 앨리스는 새로 지은 캘리포니아 과학아카데미에 옛날보다 더 훌륭한 식물표본집을 선사했고,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식물학자라는 명성을 얻었다.
88p. 정식으로 고등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앨리스는 과학단체로부터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았다. <미국의 남성과학자>라는 책의 각 권에는 그녀 이름 옆에 별이 붙어 있었다. 남성 이름과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1950년 아흔 둘에 앨리스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제 7회 국제식물학술대회에서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었고, 1953년 10월 30일 아흔다섯의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135p. 수학자이자 프로그래머로서 해군 소장을 지냈던 그레이스 머레이 호퍼의 연구와 인생을 들여다보면 여성이 남성보다 수학과 컴퓨터에 약하다는 통념을 완전히 깰 수 있다. 그녀는 현대 컴퓨터 기본기술을 발전시키는 데 이바지했고, 세계 최초로 가장 큰 진공관 컴퓨터를 만드는 현장에 있었다. 또한 초창기에 서로 다른 전자 컴퓨터 프로그램들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던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136p. 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그레이스 호퍼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미국 해군과 컴퓨터였다. 애국심이 강했던 그녀는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43년 12월 해군에 지원해 해군 소위로 임관했다. 그녀는 미연방 해군 예비대 산하 여군으로 구성된 WAVES 부대에 배치되어 하버드대학 연락장교로 일하면서 군수참모부의 컴퓨터프로젝트를 돕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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