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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book lover

담배는 숭고하다 / 리처드 칼라인

[ 서문 ]

 

영화에 나오는 담배는 언외의 의미로서, 말없는 소제목으로서, 그리고 때로는 행위의 명백한 전제나 기호의 열려진 의미체계를 수반하기도 하고, 이에 모순되기도 하며, 이를 뒤짚어 엎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만일 영화에 나오는 담배는 단순히 소품일뿐만 아니라 등장인물이기도 하고, 또한 때에 따라서는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고 가정하면 문제는 좀더 복잡해진다. 어떤 영화에서는 담배가 너무나도 많이 나와서 담배 그 자체가 포즈와 개성, 음성까지 지닌 하나의 배역, 아니 심지어는 주인공 역을 갖게 되기도 한다. '담배주의'의 이런 가능성에 대한 설명은, 오로지 잉그리드 버그만 한 사람만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들이 끊임없이, 열정적으로, 그리고 의미심장하게 담배를 피워대는 여화 <카사블랑카>에 나오는 담배에 관한 분석의 장으로 미루겠다. (33p.)

 

1856년에 <Paris fumeur>(파리의 흡연가)라는 제목의 흡연을 다룬 저널은 '흡연은 곧 기도다'라는 모토를 지녔었다. 현대의 많은 작가들에게 있어서는, 그중에서도 특히 <오늘의 불>의 저자인 애니 레클레에게 있어서는 '흡연은 우리시대의 기도'였다. 담배를 피우는 순간 우리는 평범한 경험에서 벗어나게 되고 고도의 집중으로 인해 초월감이라는 것을 맛보게 되며 불과 연기와 손끝에 매달려 있는 불똥, 폐, 호흡, 그리고 입의 종합적인 의식을 경험하게 된다. 또한 흡연은 무한이라는 것의 작은 분출을 가능케 해주며 또한 비록 작기는 하지만 견해를 바꿔주고 아울러 비록 짧기는 하지만 자아 밖에 있는 황홀감을 허용해준다.

 

담배와 관련된 것은 그 어느 것도 간단하지가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담배는 여러 면에서 모순적일 정도로 이중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담배는 맥박을 높이기도 하고 내리기도 하며, 마음을 진정시켜주기도 하고 흥분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공상을 위한 매개체가 되기도 하고 집중을 위한 도구가 되기도 하며, 피상적이기도 하고 심원하기도 하다. 또한 남성다운 군인이기도 하고 여성다운 집시이기도 하며, 동시에 미움을 사기도 하고 사랑을 받기도 한다. 담배는 잔인하면서도 아름다운 여성이기도 하며 또한 충직한 동료이기도 하다. 담배가 제공하는 쾌락의 상충적인(즉, 유감적인 것과 심미적인 것) 성질과 담배의 사회적, 문화적 가치의 이중성은 곧 놀랄 만큼 대조적인 담배의 생리학적 효과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스베포의 제노는 담배를 고려하는 것으로부터 발생하는 많은 역설들의 현대적인 대가인 것이다.(51p.)

 

[1장 담배란 무엇인가?]

 

모든 흡연가들이 직관적으로 알듯이, 그리고 많은 문학작품 내지는 영화들이 입증하듯이 이 담배는 담배가 아니라 시계와도 같다. 다시 말해서 충분한 빛이 시간 감광유제에 마술을 부리는 순간을 예측하기 위해서 그 사진작가가 사용하는 것은 친근한 계수기, 즉 담배인 것이다. 사진의 영상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우리가 언뜻 보게 되는 영상은 그 사진작가가 담배가 아닌 시계를 피우는 모습이다. 다시 말해서 이 영상을 생산하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시간을 측정하는 시계를 피우고 있는 모습인 것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철학적 질문을 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담배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 담배는 본질상으로 매우 보조적이고도 무의미하며, 비본질적이면서도 사소하고 경시되는 것처럼 보이므로, 담배는 타당한 정체나 성질, 기능이나 역할을 거의 갖고 있지 못하다. 담배는 기껏해야 피우고 나면 곧 사라지고 마는 존재이며, 따라서 문화적인 인공물의 위치나 이 세상에서 제 위치가 있는 것으로서의 신분, 그 존재에 관하여 철학적인 조사대상의 위치를 획득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인 셈이다. 그러나 담배는 비록 작지만 그 자체로서 존재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단순하기보다는 오히려 항상 복합적이고도 다량이며, 증식을 하는 속성이 있다. 각각의 모든 담배는 흡연가가 계속해서 소비하는 독같은 다른 모든 담배들과 연결됨을 의미한다. 각가의 담배는 필수불가결한 또 다른 담배를 즉각 불러오며 그 담배는 계속되는 흡연에서 바로 앞선 담배에 재결합을 하게 된다. (60p.)

 

아리스토텔레스가 "담배란 무엇인가?" 하고 물을 수가 없었던 데는 다른 부수적인 이유들이 있다. 담배는 고대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존재였으며, 모든 괴상한 식물을 다 알고 있었던 아리스토텔레스마저도 식물학적으로든 경험적으로든 담배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점은 아리스토텔레스는 담배의 경험에 대해서도 몰랐다는 것이다. 이는 고대인이 현대성에 관한 정보에 대해서 들은 바가 없었다 라고 어떤 이들이 말하는 것과 동일한 것인 셈이다. 16세기에 담배가 유럽에 소개된 것은 활자화된 책의 발명과 그것의 보편화, 그리고 신세계의 발견과 이성적, 과학적 방시의 발달과 중세신학에 대한 확신의 동시다발적인 상실에 수반된 현대적 의식의 시초인 '불안의 시대'의 도래와 일치했다. 불안의 시대는 비교할 수 없는, 그리고 아마도 필수불가결한 치유를 담배라는 형태로 주었다. 그것은 자기네 대륙에 인접해있는 뜻밖의 거대한 미지의 세계와 직면하게 된 서양문화의 유럽중심적인 의식 속에, 콜럼버스의 발견이 야기한 불안에 대해 콜럼버스가 신세계에서 가져온 해독제였다. 신체에 미치는 상호모순적인 영향과 독성이 있는 맛, 그리고 불쾌한 쾌감이 함께하는 이 역설적인 흡연의 경험은 낡은 확신에 대한 잇따른 공격의 충격과 더 거대한 미지에 대한 기대로부터 발생하는 불안을 완화시켜주는 약이라는 현대성 때문에 열렬한 애호를 받았다.(61p.)

 

흡연은 대체로 아무것도 안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즉 일반적으로 흡연은 행동으로 정의되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행동에 수반될는지도 모르지만 여하튼 행동으로서는 간주될 수 없는 행위, 즉 제스처이다. 그것은 먹는 것과 자는 것과는 달리 유용성이 없으며 여가나 작업시간 이외의 시간에 속하고 기껏해야 일을 보조하는 동반자정도인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르트르가 담배를 피우면서 뭔가에 매진을 하는 사람의 이런 묘사를 끝내기 전에 그의 보야드 담배를 몇 모금이나 빨아야만 했었을까 하고 우리는 궁금해 한다. 실수로 탄약창고를 폭파하거나 철학서적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에서처럼 담배가 중요치 않다는 것을 설명하는 매우 철학적인 이야기를 생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함에도 불구하고, 담배의 전형적인 묘사처럼 담배의 유용성을 조직적으로 깎아내리고 있다.

 

[제 3장 제노의 역설]

 

동물들이 자연도태에 의해 변화된 상황에 직면하는 새로운 능력을 발전시켜 새로운 도전에 더욱더 강하게 대처를 하는 반명에, 인간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기계가 수적으로 증대하고 강력해짐에 따라 점점 더 약해진다. 우리는 '안경을 낀 동물'이라고 제노는 말하고 있다. 즉 우리는 연약함을 우리의 외부에 적용하는 도우가 기계 등의 기구를 가지고 보충을 하여 더 이상 스스로가 노력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을 성취하게끔 허용해주고 있는 것이다. 점점 증가하는 질병과 기생충들은 진보와 발전, 그리고 성장과 불가피하게 공존하는 것들이다. 즉 문명은 우리의 건강을 위해서는 해로운 것이다. 만약 우리가 건강이란 것을 믿고 있다고 한다면 말이다. 의사들은 우리들이 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믿기를 바란다. 그러나 자유는 오직 자연에만 속하는데 자연은 자유롭지가 못하다. 제노는 "건강을 획득하기 위한 모든 노력은 헛수고다. 건강이란 단지 동물들에게만 속할 수 있다. 이들에게 있어서는 진보의 유일한 개념이 자신의 육체에만 있다." 라고 말한다. 문명 속의 삶은 우리가 질병들을 치료하는 것보다 더 빠르게 새로운 질병들을 창조한다. 그것은 단지 이것들에게 약을 투여하거나 그것들 가운데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택하는 문제다. 흡연을 포기함으로써 우리가 건강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개념은 흡연 그 자체가 창조하는 금연의 충동을 더욱더 부채질 하는 환상이다. 인간은 점점 더 약해지고 점점 더 기계에 의존하는 대가를 지불하고는 비로소 성공하는 것이다. 즉 점점 더 수동적이고 의존적일 때 인류는 성공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건강'이란 없으며, 있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질병과 기생충이라고  하는 깨달음이다. 그러나 그것이 삶이다. 흡연분석은 삶의 질병과 기생충들에 대한 유일한 치료는 이들에 대한 박멸이라는 깨달음으로 인도해준다.(169p.)

 

[제 4장 카르멘의 악마]

 

공공연하게 담배를 피우는 여성은 여성들은 베일로 얼굴을 가려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 사적으로, 즉 두 명의 남녀 사이에서는 그것은 그의 남성적인 입장에 저항하려는 그녀의 결정과 그의 아담적인 호흡을 그녀에게 불어넣어 주고자 하는 의지에 대한 영원한 신호가 된다. 그녀가 빨아대는 모든 담배연기는 그녀가 호흡을 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을 그에게 말하는 것이다. 그것도 전적으로 그녀 자신의 호흡을 말이다.(209p.)

 

모리악은 소설 서문에서 밝히기를, 이야기의 끝부분에서 그의 괴물을 부정적인 초월의 성자, 즉 범죄의 공포 속으로 내려가는 것을 통해 영적인 승화를 획득하는 자로 만들려는 유혹을 거부했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역전의 가능성은 마지막 대목에서 예시가 되고 있다. 즉 여기서 그녀는 원하는 만큼 담배를 피울 권리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테레스는 술은 적게 마셨지만 담배는 무척 많이 피웠다. 그녀는 마치 행복한 사람인 양 혼자서 마구 웃어댔다. 그녀는 거리로 나와 마음껏 자유자재로 활보를 했다." 그녀는 얼굴을 갑자기 바꾸고는 군중들 속으로 뛰쳐들어가서는 예측 못할 만남과 결정 못할 많은 기회에 자신을 내어맡긴다. 독자들은 혹시라도 담배가 걸어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모르겠다.(212p.)

 

[논박의 여지가 있는 결론]

 

담배의 복합적인 유익과 부정할 수 없는 미적 속성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담배의 가치는 오로지 그것의 좋지 못한 효과하고만 관련되어 결정이 되고 있다. 즉 담배는 당신의 건강에 해롭다 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묻지 않을 수 없다. 즉 이 경우에 있어서 선한 것과 아름다운 것의 유일한 가치판단 기준인 건강에 부여된 가치는 무엇인가 하고 말이다. 스베포에 따르면 좋은 건강이란 근본적으로 문명의 진보와는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문명은 그것의 본성에 의해 나약함을 증대시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삶 그 자체는 점진적인 질병이며 우리는 죽은 다음에 비로소 이 질병으로부터 해방이 되는 것이다. 즉 만약 건강이 질병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라고 한다면 그것은 단지 우리가 죽음으로써만이 비로소 획득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산다는 것은 결국 스스로 독을 선택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스베포의 소설의 주인공인 제노는 그의 인생말기가 되어서, 언젠가 마침내 건강하게 될 것이라는 외고집적 환상을 포기하는 순간에 자신의 평생 동안의 흡연습관을 비로소 버리게 된다.(286p.)

 

거대한 청교도적 억압은 '약물(Drug)' 이라는 단어의 속성을 포착하여 조정하고 그것의 폭을 좁혀서 한정시키고, 그것의 언외적 의미를 많고도 다양한 물체에가지 광범위하게 팽창시킴으로써 시작했다. 약물의 강박충동적 사용은 문명의 시초부터 그 특징이 되어왔기 때문에 그것은 제거될 수도 없고 제거되어서도 안된다 라고 생각하는 것도 약물이 자유롭게 입수 가능할때 그것의 사용은 '과도함'과 '절제' 아마도 생존을 위해 필요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은 사회적 위기의 순간이나 인생의 시련기에 특히 더 필요할는지 모른다. 그리고 검열관들은 희미하게나마 그것을 이해하고 있음직하다. 만약 그들이 이해관계가 그들이 혐오하는 체 하는 것을 몰래 조장시키려는 데 있지 않다면 그들의 목적은 감시세력을 증강하고 연대를 강화하며 일반적인 치안유지 원칙을 증대하는 것이다.(29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