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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그 날의 기록 / 진실의 힘 기록팀

 

 

 

너도 나라 달력 세미나 | 세월호 그날의 기록(진실의 힘) | 발제자 : 김민석

 

 

2016/07/12 - [&] - 4월 세월호 세미나 기획안 주저리 (2016.03.30)

2016/07/12 - [&] - 4월 세월호 세미나 기획안 (2016.03.31)

 

세월호, 그날의 기록
국내도서
저자 : 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
출판 : 진실의 힘 2016.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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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세월호 세미나 4주차 / 5부 구할 수 있었다  / 160425 월

 

 

1장 선원이 구할 수 있었다

 

562-563p 배는 점점 더 기울어져 9시 45분경에는 강혜성이 있던 3층 로비의 좌현 출입문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그런데도 강혜성은 오히려 “현재 위치에서 대기하시고, 현재 위치에서 안전하게 기다리시고, 더 이상 밖으로 나오지 마시기 바랍니다.”라고 방송했다.

  방송횟수도 문제였다. 동영상 등 기록에 남은 것만 해도 50분 남짓한 시간 동안 무려 10번 이상 “움직이지 마라”, “절대 이동하지 마라”, “밖으로 나오지 마라”고 되풀이했다. 실제로는 더 많이 “선내 대기하라”는 방송이 나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위급 상황에서 선원들의 지시를 기다리고 따를 수밖에 없는 승객들에게 이처럼 반복적인 대기 방송은 탈출 의사를 포기하게 만드는 강력한 억제력으로 작용했다. 탈출하려고 하다가 안내방송을 듣고 스스로 포기하거나 다른 승객들의 만류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일반 승객 김도영씨는 비상구가 설치되어 있는 3층 선수 쪽 객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출구를 알고 있어 빠르게 갑판으로 나갈 수 있었지만 다른 승객들이 문을 열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위기감을 느낀 김도영씨는 일행을 데리고 객실을 빠져나와 4층으로 탈출했다. 4층 선미 쪽 객실 복도에 있던 학생들은 복도 끝 출입문만 열면 밖이었지만 움직이면 더 위험하니 대기하라는 안내방송에 따라 친구들과 함께 기다리는 쪽을 택했다.

  검찰은 강혜성을 기소하지 않았다. 함께 적극적으로 도주하지 않았고 마지막에 몇몇 승객의 탈출을 돕기도 했다는 점에서 다른 선원들과 차이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강혜성은 사무장 양대홍씨로부터 지시받은 수준을 넘어 매우 강도 높게 반복적으로 승객들의 탈출 의지를 꺾는 방송을 했다.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크게 변해 누가 봐도 탈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급박한 시점에도 강혜성은 ‘임의로’ 승객들의 탈출을 가로막는 방송을 계속했다. 매우 심각하고 중대한 판단 착오였다. 검찰이 강혜성의 책임을 일방적으로 면제해준 것은 적절한 조치라고 할 수 없다. 모든 정황을 밝혀 법원의 판단을 구하는 것이 옳았다.

 

568-569p. 제대로 된 퇴선명령이란 무엇인가.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선장의 책임은 어디까지 인가.

  선장은 선박의 최고 책임자로서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선언들을 적절하게 지휘해야 한다. 퇴선을 해야 한다면 선장은 ‘퇴선명령’을 내려야 한다. 선장의 퇴선명령이란 승객들에게 “밖으로 나가라”고 말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선 1) 선원들에게 운항관리규정에서 정한 비상부서배치표상 임무를 다하도록 명령하고, 2) 승객들을 퇴선 장소인 비상대기갑판으로 유도한 다음, 3) 구명뗏목과 미끄럼틀을 터뜨려 퇴선 준비를 하고, 4) 승객들을 해상으로 퇴선시킨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이루어져야만 선장이 퇴선명령을 제대로 했다고 할 수 있다.

선원들의 임무 : 승객들 여객구역 대기 > 선장 ‘총원 퇴선’명령 > 선원들 비상부서배치표 임무 수행 > 승객들 비상대피구역 이동 > 해상으로 퇴선

 

573p. 선장의 퇴선명령과 비상부서 배치 명령이 없었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도주한 선원들의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다.

  비상사태에 선원들이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려면 반복 훈련이 필요하다. 그러나 세월호 선원들은 퇴선 훈련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다.

 

576p. 선원사건, 검찰 강원식 8회 피의자신문조서(2014.5.13.) 수사기록 

검사 : 세월호 침몰 당시 동영상을 보면 2014.4.16. 09:45 경 피의자를 비롯한 조타실 선원들이 해경 경비정에 승선하는 장면을 확인 할 수 있는데 피의자는 당시 승객들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였는가요.

강원식 : 그때 당시에는 승객들에 대한 생각이 없었습니다. 해경 경비정에 승선하고 난 다음 그때서야 승객들이 생각났습니다.

검사 : 피의자는 세월호 1등 항해사로 비상시 승객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야 할 임무가 있는데 해경 경비정에 탑승하고 난 다음 비로소 승객들이 생각났다는 말인가요.

강원식 : 네. 경비정에 승선하고 난 다음 승객들에 대한 생각이 났습니다.

 

579p. 승객들에게 퇴선을 명령하면 선원들의 순서는 늦어질 수밖에 없다. 승객들이 탈출하기 시작하면 선원들이 먼저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선원들의 순서는 승객들을 다 내보낸 뒤에야 오게 돼 있다. 그런데 옆에 와 있는 경비정은 수백 명의 승객도 다 태울 수 없는 소형이었다. 배는 점점 기울어지는데 시간이 없었다. 승객을 탈출시키기 시작하면 선원들에게는 기회가 없다는 뜻이었다. 운이 좋다고 해도 할 수 있는 것은 바다로 뛰어드는 것 밖에 길이 없었다. 구명뗏목을 터뜨리지 못한 상황에서 조타실에 있던 10명 중 구명조끼를 입은 사람은 3명밖에 없었다.  “당시 상황으로 보았을 때 만약 승객들과 선원들이 한꺼번에 바다로 뛰어든다면 구명조끼를 착용하지 못한 선원들 가운데 사망자가 나올 가능성이 있었”다. “매우 위험”했고 “죽는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았다.

 

590-591p. 해경 123정이 선장과 선원들을 제일 먼저 구한 것을 두고 많은 의혹이 제기됐다. 그들이 선원인 것을 해경이 알았다고 볼 수 있는 여러 정황이 있지만, 정장 김경일을 비롯한 123정 대원들은 끝까지 몰랐다며 부인했다. 9시 39분경 조타실 좌현에서 밖을 쳐다보던 박경남이 박기호를 비롯한 기관부 선원들의 도주 장면을 보고 소리쳤고, 마침 100여명이 떨어져 있던 123정에서 박경남을 봤다. 123정이 배를 타고 조타실로 다가와 배를 대자 박경남, 박원식, 이준석, 박한결, 김영호 순으로 탈출했다.

  이들이 선원인 줄 몰랐다는 해경의 변명을 받아들인다면, 해경은 선원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구조 유도”를 한 것이 아니다. 일반 승객으로 잘못 알았던 것이다. 만일 선원인 줄 알았다면 해경은 수백 명의 승객을 내팽개치고 도주하는 이들을 결코 먼저 구조해서는 안 됐다. 이들이 돌아가서 배에 남아있는 마지막 승객까지 구조하도록 해야 했다. 이준석을 비롯한 선원들이 123정으로 도주하면서 선장 및 간부 선원인 사실을 밝히지 않았고, 123정 대원들 또한 그들이 선원인 것을 몰랐다고 극구 부인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2장 해경도 구할 수 있었다

 

592p. 서해 해경청 상황담당관 유연식은 “선장은 엘리트”라며 구조는 선장이 80퍼센트를 하고 해경이 나머지 20퍼센트를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장완익(세월호 특조위 위원) : 선장이 다 알아서 하라, 라고 생각하고 간 것입니까?

유연식 : 그게 아니라 각자 역할에 통상적으로 하는 게 있습니다. 배에서 사고가 나면 자발적인 조치를 해야 외부 기관에서 할 수 있습니다.

  해상 사고 때 선장과 선원들에게 일차 구조 책임이 있는 건 맞다. 아리아케호에서 선장이 끝까지 배에 남아 승객 7명과 선원 21명 전원을 구조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세월호 사고처럼 “무능한 선장”이 수백 명을 내버리고 탈출하는 상황에서 구조 당국은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 해경이 그랬듯이 배를 버린 선장과 선원들을 제일 먼저 구조하고 배 안에 갇혀있는 승객들은 팽개친 다음 선장과 선원들을 비난하기만 하면 되는가.

 

602p. 배 안에 승객 절반 이상이 갇혀 있다고 김경일이 보고하는데도 침묵했다. 퇴선 명령을 하라고 지시하는 지휘부는 없었다. 본청 경비안전국장 이춘재는 해경 지휘부가 퇴선 명령을 하지 않은 이유를 “현장 상황을 잘 아는” 현장지휘관 함정(OSC)가 하는 게 “합리적”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OSC인 123정장 김경일은 해야 할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지휘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나. 지휘부는 왜 존재하나.

  OSC 지정과 역할은 해경이 정한 해상 수색구조 매뉴얼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수난구호법은 구조 활동의 지휘, 통제를 해양경찰서장 김문홍과 서해해경청장 김수현, 해경청장 김석균이 맡도록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퇴선명령은 OSC인 123정장 김경일 뿐 아니라 김문홍, 김수현, 김석균도 할 수 있고 해야 했다. 매뉴얼보다 법률로 정한 지휘부의 책임과 권한이 더 크다.

  퇴선 명령의 수단은 크게 두 가지였다. 1) 123정장이나 세월호 방송 장비를 이용해 퇴선 방송을 하거나 2) 123정 대원이나 헬기 항공구조사가 선내에 진입해 퇴선을 유도하는 것이다.

 

606p. 박상욱은 선원들이 다 빠져나온 세월호 조타실에 들어갔다. 박상욱은 고무호스를 잡고 조타실로 어렵지 않게 올라 안쪽까지 들어가 조타실을 둘러봤다.

  빨간색 비상벨이 달린 방송장비는 오른쪽에 보였다. 빨간색 비상벨을 누르고 ‘퇴선하라’ 방송하면 선내에서 들렸다. 박상욱은 기관 직렬이지만 소형 함정에 승선할 때는 기관과 항해를 함께 맡았다. 그래서 “선내 안전 방송 정도는 어떻게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퇴선방송을 하지 않았다.

 

607p. 123정 대원 중 직접 구조 활동을 한 인원은 구명보트에 탄 김용기, 박은성 2명에 불과했다. 이형래, 박상욱은 세월호에 올라갔지만 구조 업무와는 무관했다. 나머지 대원들은 123정 갑판에 서서 구명보트가 실어온 사람들을 끌어올리기만 했다. 123정은 직접 구조에 나서지 않았다. 구명보트만 왔다 갔다 했다.

 

3장 구할 수 있었다

 

624-629p. 선장의 퇴선 명령이 없고 “선내 대기하라”는 안내방송이 반복적으로 나왔지만 일부 승객들은 배에서 탈출했다. 9시 26분 우현 쪽에서 헬기 소리가 들리자 고무호스와 소방호스를 이용해 우현으로 올라가기도 했다. 좌현 쪽에 있던 승객들은 물에 잠긴 출입구로 잠수해서 나왔다. 선미 쪽 객실 복도에 있던 승객들은 선미 출입구로 탈출했다. 배 안에 물이 가득 찬 10시 22분경까지도 승객들은 필사적으로 헤엄쳐 우현 갑판으로 솟아올랐다.

  해양심판원은 보고서에서 “사고 당시 바다가 잔잔하였고 수온이 약 12도로 생존에 급박한 위험을 초래하지 않았고 주변에 구조세력이 많이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사고 발생 후 선장 등이 일반적인 선원의 상무에 따라 여객을 적절하게 대피시켰다면 인명 손실은 없었거나 있었더라도 극소수에 그쳤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고 했다.

 

- 구조할 시간

  가천대학교 초고층방재융합연구소 박형주 교수도 가천대 보고서를 검찰에 제출했다. 이 보고서는 세월호에서 퇴선 명령이 이루어진 경우 배의 기울기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탈출 경로와 탈출 소요 시간을 예측했다.

 

8시 50분경, 사고 발생 직후

  8시 50분경 세월호는 좌현으로 약 30도 기울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교적 보행이 자유롭다고 보고 탈출 경로를 3층 좌현 갑판으로 한정했다. 아직 기울기가 작아 4층과 5층 갑판에서 바다로 바로 뛰어내리기에는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뮬레이션 결과 승선원 476명이 모두 탈출하는 데 5분 5초가 걸렸다. 8시 50분경 선장이 퇴선 명령을 하고 선원들이 임무를 다했다면 늦어도 8시 55분에는 전원이 해상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9시 24분, 둘라에이스호 교신

  세월호 부근을 항해하던 둘라에이스호 문예식 선장이 “탈출을 시키십시오 빨리!”라고 소리쳤다. 가천대 보고서는 세월호가 이때 좌현으로 약 52도 기울어졌을 것으로 추정했다. 승객들은 객실에서 대기하는 것을 전제로 했다. 출입구가 우현 쪽으로 나 있는 좌현 객실 승객들은 방에서 나오면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야 했다. 이들은 다른 객실 승객보다 60초 늦게 이동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대피 시작 13분 후인 9시 45분부터는 3층 갑판이 침수됐다. 그 후에는 3층 갑판을 사용하지 못하는 로 설정했다.

  시뮬레이션 결과 476명이 모두 탈출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9분 28초였다. 첫 번째 조건보다 두 배 정도 지연되었지만, 적어도 9시 35분경에는 모든 승객이 탈출할 수 있었다.

 

9시 45분경, 조타실 선원 탈출

  9시 45분경, 조타실에 있던 선원들이 해경 123정에 올랐다. 세월호는 좌현으로 약 59도 기울어져 있었다. 이 시점에 선장이나 선원이 방송 장비로 퇴선 명령을 하고, 객실에 있던 승객들이 대피를 시작했다면 어땠을까. 3층 갑판은 이미 침수돼서 4층 갑판을 탈출 경로로 삼았다. 5분 뒤인 9시 50분경 4층 좌현 갑판에도 침수가 진행됐다. 다시 5층 갑판을 통해 바다로 탈출하도록 설정했다. 시뮬레이션 결과 476명이 모두 탈출하는 데 6분 17초가 걸리는 것으로 나왔다. 선원들이 홀로 도주하지 않고 제대로 퇴선을 유도했다면 배가 침몰하기 전에 모든 승객이 배에서 나올 수 있었다는 뜻이다. 이는 곧 해경이 선장과 선원들을 구한 직후 승객들을 퇴선시켰을 경우 거의 대부분의 승객을 구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 구조할 세력

  9시 20분경 유조선 둘라에이스호는 기울어지는 세월호에 제일 먼저 다가갔다. 2천 톤 규모의 둘라에이스호는 배 길이 105미터, 폭 15미터로 세월호 승객 전원을 선실과 갑판에 수용할 수 있었다. 선장을 포함한 선원 12명 중 구조 가용 인원이 8명이었고, 15인승 구명뗏목 1개, 구명조끼 16개, 라이프링, 라이프라인을 가지고 있었다. 기름을 가득 채운 상태라 수면과 높이 차가 1.5~2미터밖에 되지 않았다. 표류하는 승객은 사다리로 유조선에 올라탈 수 있었다.

  둘라에이스호 문예식 선장은 구조할 수 있는 환경이 아주 좋았다고 말했다. 승객들이 구명조끼를 입거나 라이프링을 착용하고 구명뗏목에 탑승해 떠 있었다면 주변에 와 있던 많은 선박들이 구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어업지도선과 어선들이 잇따라 도착했다. 9시 40분경 전남 707호, 9시 45분경 드래곤에이스11호, 9시 50분 경 에이스호, 진도호, 전남 707호 고속보트, 10시 이후 전남 201호 고속보트, 진도 아리랑호가 도착했다. 해경 123정이 접근을 막았지만 어선들은 세월호에 “이물을 그냥 무조건 들이대고” 승객들을 “끄잡아냈”다.

 

  “이런 염병, 해경이 다 뭔 소용이여, 눈앞에서 사람이 가라앉는디. 일단 막 갖다 대서 살리고 보는 게 이상적이제. 해경 지시 들었다가는 갸들 다 죽었어. 안 그렇소?”

 

  20명의 승객을 구해낸 태선호 김준석 선장의 말이다. 현장에서 마지막까지 승객들을 구한 어민들이 제일 안타까워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해경의 소극적인 태도였다. 승객들을 탈출시키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경이 단 한명이라도 세월호 안으로 들어가서 나오라고 방송만 했어도, 그 소리가 ‘야 나오란다’ 이렇게 전달돼 다 나왔을 거여.”

 

  세월호에 달라붙어 승객을 구하다가 뱃머리가 세월호 후미 난간에 걸려 함께 빨려 들어갈 뻔한 위기를 가까스로 넘기며 25명의 목숨을 살린 피시헌터호 김현호 선장은 통탄했다.

 

  둘라에이스호와 어업지도선들 외에 10시 30분경까지 50여척의 어선이 현장에 도착해 대기하고 있었다. 바다에 떠 있는 승객을 충분히 구조할 수 있었다. 공중에 떠 있는 3대의 헬기와 항공기 703호는 표류하는 승객을 추적할 수 있엇다. 특히 헬기 511호와 512호, 항공기 703호는 구명뗏목도 갖추고 있었다.

 

  당시 해역 수온은 12.6도 였다. 최악의 경우 승객들이 구명조끼를 입은 채 바다에 떠 있기만 해도 최대 6시간까지 버틸 수 있었다.

 

  구조할 시간도, 구조할 세력도 부족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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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니체에 따르면, 수치심은 외적 권위에 대한 고려에서 비롯되는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자긍심과 명예가 충족되지 못했을 때 그 결핍을 알리는 일종의 신호로서 작용한다. 따라서 수치심은 자기 고양을 욕망하는 고결한 존재(der Edle)가 갖는 감정이다. 고결한 자는 고통스러운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역량이 자기 안에 있음을 알며, 그 역량을 미처 사용하지 못한 자신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낀다.

  

니체의 입장에 우리가 난감해하는 것은 그가 수치심에 대해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을 펼쳐서가 아니라 고결한 자의 수치심과 선한 자의 연민을 대비시키며 후자를 집요하게 비난하기 때문이다. 고결한 자와 비교했을 때 연민의 정을 지닌 선한 자는 사실 자기 역량의 최소치만을 사용한다. 그들은 고통의 상황을 그대로 두고서 아주 소량의 도덕적 선행만을 반복한다. 니체는 이런 도덕주의자들을 "마비되어 더이상 힘을 쓸 수 없는 그런 무기력한 앞발을 갖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자신이 선하다고 믿는 그런 겁쟁이"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앞발을 들어 약자를 해치지 않는다는 사실에 만족하느라 분주한 통에 수치심을 느낄 겨를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역량, 즉 진정으로 행하고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고통받는 이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대신 그 고통 앞에서 수치심을 느껴라. 연민이란 참으로 게으르고 뻔뻔한 감정이다.' 상식적 관점에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주장이다. 그러나 수전 손택 역시 비슷한 생각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어떤 이미지들을 통해서 타인이 겪고 있는 고통에 상식적으로 접근 할 수 있다는 것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텔레비전 화면에서 클로즈업되어 보여지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특권을 부당하게 향유하는 사람들 사이에 일련의 연결고리가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준다.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는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마음껏 가엾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은 고통받는 이들의 상황에 우리 자신이 아무런 책임도 없다고 생각할 때뿐이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우리는 그렇게 느낄 수가 없다. 우리는 고통사고 사망자들을 불쌍하게 여길 수는 있지만 같은 방식으로 세월호 희생자들을 불쌍하게 여길 수는 없다. 손써볼 사이도 없이 발생한 사고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충분히 구할 수 있는 이들을 죽어가도록 내버려두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래도록 괴로워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죽은 사람들이 단지 불쌍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죽어가는 긴 시간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이 엉망진창인 시스템을 방치한 우리 자신에 대한 수치심 때문에 몸서리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동정심 많고 선량한 얼굴을 한 정치인들을 보고 많은 사람이 어이없어하는 이유이기도 한다. 이 참사가 고통사고에 비견될 수 있다면, 모두들 자신이 음주운전으로 타인을 죽인 운전자라도 되는 듯 자책하는데 유독 정치인들만이 길 가다 교통사고를 목격한 행인처럼 굴고 있는 듯하다. 목격한 것도 신의 뜻이니 모처럼 좋은 일 좀 해보자는 것일까? 그러니 사고 이후 정치인들이 내놓는 주된 수습안들이 모두 연민과 시혜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가엾은 희생자의 가족들을 위해 적절한 보상금을 책정하고 생존자에게 특혜를 베풀어서 착한 정치인으로 남고 싶은 거다.

 

배를 운항한 사람들과 구조를 맡았던 사람들과 상황을 보도했던 사람들과 그 모든 것을 총괄해야 했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뽑아놓고 감시하고 항의해야 했던 우리와…… 모든 이들의 잘못이 들통나버렸다. 수치심으로 얼굴 붉히며 참사를 가져온 겹겹의 잘못에 대해 오래오래 따져 물어야 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누군가 지독한 수치심으로 괴로워해야 할 순간에 그저 울었다는 사실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대단한 것이라도 베풀듯이 눈물을 보였다는 시혜의 관점이 아니라면, '용서해주세요'도 아니고 '잘못했습니다.'도 아닌 '도와주세요'라는 그토록 당당한 선거 구호가 등장할 수는 없다. 그런 이들이 이제 노란 리본을 보면 짜증이 날 법도 하다. 동정이나 연민은 베푸는 사람의 마음이지 받는 이가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충분히 동정해줬는데도 자꾸 사실을 규명해야겠다니 이제는 피곤도 하고 화도 치밀것이다. 정치가 있어야 할 곳에 연민과 시혜의 언설이 난무하는 사회가 어째서 뻔뻔스러운 사회인지 나는 이제야 알 것 같다. 백 일 넘는 시간 동안 참담한 상황을 보며, 서글프게도 니체의 저 구절들이 이해되었다.

 

진은영, “우리의 연민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고, 

우리의 수치심은 자정의 그림자처럼 길다”, 

<눈먼 자들의 국가>, 문학동네

 

 

 

- 세월호 이후, 우리사회는 어떤 사회가 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나는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

- 사회 전체가 반성하지 않는 것, 지도부의 인사들이 반성하지 않는 것 그리고 내가 반성하지 않는 것과의 관계는.

- 영상물 : 다이빙벨, 나쁜 나라, 업사이드 다운, 그것이 알고 싶다-세타의 경고 

- 대한민국에서 직업을 갖는 것의 의미, ‘직업인’은 왜 존재하는가?

- 이 사회에서 ‘의미’가 갖는 위상은 무엇인가.

- 이제 나는 길게 늘어진 연민이 아닌, 내 안에서 발생한 부끄러움으로 세월호를 말할 수 있을까. 

 

 

 

4월 세월호 세미나 3주차 / 4부 '대한민국에서 가장 위험한 배' 어떻게 태어났나

 

세월호 세미나 3차에서는, 4부 '대한민국에서 가장 위험한 배' 어떻게 태어났나, 를 함께 봅니다. 진실의 힘 기록팀 후기에 따르면 침몰 원인과 위험한 배의 탄생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고 합니다. 배는 복원력이 있어서 기울어졌다가도 원래 상태로 돌아와 바로 섭니다. 그래서 배입니다. 그러나 세월호는 무리한 증,개축으로 복원력이 나빠진 데다 화물을 지나치게 많이 실었습니다. 규정보다 화물을 많이 싣다보니 고박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평형수도 빼내야 했습니다. 상습과적과 부실 고박 때문에 기울어진 배가 오히려 더 기울어져 30도가 됐습니다. 그러자 바닷물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닫혀 있어야 할 문들이 열려 있고 밀폐돼야 할 문들 틈새가 벌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고 후 40분 동안, 1층과 화물칸이 침수됐습니다.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는 듯 느껴졌지만 물이 차고 있었던 것입니다. 3층까지 물에 잠기자 배는 빠르게 기울어졌고 결국 뒤집어졌습니다. 이 내용이 3부 왜 침몰했나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함께 읽을 4부에서는, 세월호를 어디서 어떻게 왜 들여왔고, 어떻게 증 개축을 시행했고 그 배는 어떻게 심사를 통과하여 운행할 수 있었는지, 참담한 결과를 가져온 세월호의 과거에 대해 알아봅니다. 글을 읽다보면 세월호 하나에 얼마나 '한국적인' 문제들이 얽혀있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 진행할 달력 사업들에서 우리가 고민해 볼 지점을 많이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4월 세월호 세미나 2주차 / 2부 왜 못 구했나 / 20160411 월

 

1장 늦은 출동

- 관제 실패 

183p. ‘진도연안VTS 운영 매뉴얼’을 보면, 관제사는 사고가 나면 인명 피해가 큰 여객선 등을 특별히 추적 감시하도록 돼 있다.

184p. 세월호 사고 직전, 야간 변칙 근무가 들통났다.

189p. 병풍도 북쪽에서 세월호는 크게 돌다가 멈췄다. 8시 52분 속도 5.2노트. 선수 방위 245도를 유지한 채 350도 방향으로 움직이더니 8시 55분부터 속도를 잃고 표류했다. 선체 이동 방향은 3도 쪽이었다. 이 상태가 지속됐다. 누가 봐도 이상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추적 관찰하는 관제사는 없었다.

190p. 결국 진도VTS가 업무태만으로 잃어버린 시간은 5분이라고 할 수 있다.

 

-상황파악 안 하는 긴급전화

199p. 배가 많이 기울어져서 움직이지 못할 정도라면 승객이 바다로 탈출할 수 있도록 갑판으로 비상 집결시키는 게 원칙이다. 그러나 세월호는 거꾸로 선내 대기하라고 방송한다고 했다. 치명적인 정보였다. 세월호 선원들이 승객의 퇴선을 준비하기는커녕 오히려 선내에서 움직이지 못하도록 지시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그러나 문명일(목포해경 상황실)은 아무런 지적 없이 “그렇게 해주세요.”라고 했다.

202p. 이들은(전남119상황실) 해경,해군,헬기가 “출동했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만 반복했다. 승객들이 어디에 있는지 선장과 선원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선장이 퇴선 명령을 했는지 등 구조 계획을 세우는 데 필요한 정보는 하나도 수집하지 않았다.

207p. 해경 지휘부는 배가 기울어졌다가 원래 상태로 돌아오거나 기울어진 상태로 상당 시간 버틸 것이라고 안이하게 판단했다. 사고가 난 배에 타고 있는 승객들이 “침몰 중”이라고 아우성을 치는데도 믿지 않았다. 본청 상황실장 황영태는 “6천 톤짜리가 금방 침몰되지 않을” 것이라고 추정하며 “승객이 겁이나서” 침몰이라고 신고했을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단정했다. “침수 중이라고 해도 배가 완전히 침몰 가능성이 있는”지 “선장과 직접 교신”헤 다시 확인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2장 구조 계획 없는 구조 세력

- 준비 없는 출동

215p. 운항 스케쥴을 확인하던 헬기 511호 부기장 김태호에게 최재영이 사고 소식을 알렸다. 항공대장실에서 대기하던 기장 양회철도 출동 지시를 들었다. 그러나 양회철, 김태호는 여객선이 침몰한다는 사실 외에 탑승객 수는 “듣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늦은 상황 전파

229p. 그나마 소방헬기 1호는 가는 도중 미리 현장 상황을 파악해 구조 계힉을 세우는 실질적인 노력을 했다. “호이스트를 타고 현장에 내려가고 혹시 바다에 승객이 많이 떨어져 있으면 구명뗏목을 던져서 터뜨려라.” 기장 신화철의 지시에 구조대원 최남곤은 휴대전화로 사고를 검색했다. “300~400명이 탄 여객선 침몰중.”

 

3장 상황파악 못하는 상황실

- 교신 없는 출동 세력

234p. 법원은 123정 정장 김경일이 사고 현장으로 이동하면서 세월호와 교신하지 않은 것을 업무상 과실로 판단했다. 합리적인 구조 계획을 세우고 일사불란하게 현장을 지휘하기 위해 사고 현장으로 가는 동안 VHF, 휴대전화 등으로 선장이나 선원과 교신해야 했다. 1) 다치거나 사망한 승객이 있는지, 2) 가장 구조가 시그반 승객이 누구이고 어디에 있는지, 3) 나머지 승객은 몇 명이고 현재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4) 승객들이 구명 조끼를 제대로 착용했는지, 5) 퇴선 지시가 내려져 승객들이 갑판 등 비상대피 장소에 나와 있거나 바다에 떠 있는 상태인지, 6) 어디로 접근해야 가장 신속하게 많은 승객을 구조할 수 있는지 등을 파악하는 게 기본 이었다. 그러나 세월호와 교신하지 않은 것은 123정만이 아니다. 사고 현장에 출동한 또다른 구조 세력인 헬기 511,512,513호도 세월호와 연락하지 않았다. 헬기를 지휘한 항공기 703호도 마찬가지 였다.

 

- 사라진 현장 보고

240p. 해경 지휘부는 세월호와 교신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현장 보고도 무시했다. 현장에서는 1) 세월호가 좌현으로 40~50도 기울어졌고, 2) 승객이 배안에 있으며, 3) 침몰할 것 같다고 잇따라 보고했다. 그런데도 해경 지휘부는 상황을 공유해 승객에 대한 구조 조치를 하지 않았다. 서로 떠넘기며 ‘골든 타임’을 날려버렸다. ‘해상 수색구조 매뉴얼’을 보면, 선박이 경사 되고 공기가 누설되는 상태에서 선체의 부력은 약 30분간 유지되는 것으로 나와 있다. 배가 바다위에 떠 있는, 그래서 승객을 구할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을 그냥 흘려보낸 셈이다.

242p. 세월호와 교신한 관제사 정영민은 감사원 조사에서 진도VTS가 세월호 선장에게 승객을 퇴선시키라고 지시하지 않은 이유를 밝혔다. 그는 “세월호 사고가 난 것은 참으로 안타깝”지만 진도VTS는 정말 최선을 다했다고 주장했다.

정영민 : 진도VTS 감사장에서 “왜 세월호 선장에게 승객들을 퇴선시키라고 지시하지 않았느냐?”는 감사관 질문에 “지금에 와서는 결과만 놓고 보기 때문에 당시에 세월호 선장에게 승객들을 퇴선시키라고 지시했어야 한다고 쉽게 얘기할 수 있지만 반대로 진도VTS에서 세월호 선장에게 승객들 퇴선시키라고 지시했는데 세월호가 침몰하지 않는 상황이 발생하여 결국 진도VTS의 지시에 따라 퇴선한 사람들이 죽거나 실종되었다고 가정할 때 그때 책임은 누가 지겠습니까?”라고 반문을 한 사실이 있습니까?

정영민 : 예. 감사관님의 질문에 대해 제가 그런 반문을 한 사실이 있습니다. 

감사원 : 그렇다면 결국 나중에 책임질 일이 두려워서 배가 침몰하고 있다고 하는데도 선장에게 승객들을 바로 퇴선시키라고 지시를 안했다고 봐야 하나요?

정영민 :(곰곰이 생각하다가) 저희가 나중에 책임질 일이 두려워서 판단을 세월호 선장에게 미룬 것이 아니고, 선장으로 하여금 퇴선 여부를 빨리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 진도VTS에서 조치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감사원: 그럼 퇴선 지시와 별개로 진도VTS에서는 세월호 선장에게 승객들을 갑판으로 대피 시키도록 조치하라고 지시하였습니까?

정영민 : 제가 승객들을 갑판으로 대피시키라고 지시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승객들이 구명동의를 착용하도록 조치하라고만 얘기했습니다.

감사원 : 구명 동의를 착용하고 선실 내부에서 대기하는 것은 자살 행위와 같다고 하는데도 세월호 선장에게 승객들이 구명동의를 착용할 수 있도록 조치하라고 하고서도 승객등를 갑판으로 대피시키라고 지시하지 않은 사유는 무엇입니까?

정영민 : 배가 침몰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상적인 선장이라면 당연히 승객들을 갑판으로 대피시켜서 구명동의를 착용하도록 조치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제가 세월호와 교신할 때 승객들이 어디에서 대기하고 있는지를 따로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감사원 : 더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정영민 : 세월호 사고가 난 것은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희가 사고 접수 후 한 일은 정말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제주VTS에서 사고 접수 후 16번으로 조난 방송을 했었더라면 구조 시간을 더 단축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다시 한 번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243p. 진도 VTS는 해경 구조 세력과 세월호를 잇는 단 하나의 소통 창구였다. 제주 운항관리실도 세월호와 교신했지만 해경 소속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진도VTS가 파악한 정보를 해경 지휘부와 구조 세력에 어떻게 실시간으로 전파하는가, 그리고 해경 지휘부의 구조세력이 그 정보를 토대로 어떤 구조 작전을 펼치는가가 구조의 성패를 결정하는 관건이었다.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다.

 

4장 책임자 없는 현장

- 123정.OSC 맞나

268p. 123정 정장 김경일도 피의자 신분으로 첫 검찰조사를 받을 때 “100톤은 연안 경비정”이지 “구조정이 아니”기 때문에  OSC 임무를 못한다고 항변했다. “ 에서는 OSC로 지정해놓고 너희가 총책임이라고 하면서 나 몰라라 하는데 그런 지휘부도 문제가 있다“

269p. OSC로 지정된 123정 대원들은 사고 현장에서 123정이 OSC인 줄 몰랐다고 주장했다. OSC의 지휘를 받아야 할 구조 세력인 헬기도 몰랐고, 현장 지휘자인 목포해경서장 김문홍, 세월호와 교신하던 진도VTS도 몰랐다.

 

- 책임 떠넘기는 지휘자들

271p. 9시 10분 해경은 세월호 사고의 구조 활동을 지휘하기 위해 중앙구조본부를 꾸렸다. 본부장은 본청장 김석균이 맡고 현장지휘자는 서해해경청장 김수현, 목포해경청장 김문홍으로 정했다. 현장 지휘란 1) 조난 현장 인명 수색 구조 2) 수난구호 협력기관과 자원봉사자 등의 임무 부여와 인력 및 장비의 배치와 운용 3)추가 조난 방지를 위한 응급조치 4) 사상자의 응급처치와 의료기관 이송 5) 수난 구호에 필요한 물자와 장비의 관리 6) 현장 접근 통제 등 효율적인 수난구호 활동에 필요한 사항 등을 챙기는 것을 말한다.

273p. “현장 상황을 확인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고 그로 인해 적절한 조치가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책임은 세월호와 교신하지 않은 123정과 현장지휘자인 서해해경청장(김수현)과 목포해경서장(김문홍)에게 돌렸다. 본청은 “현장 세력에게 직접 지시할 임무”가 없어서 123정에 세월호 교신을 지시하지도 않았고 123정으로부터 현장 보고를 받고도 승객 탈출을 지휘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해경 본청은 사고 현장을 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청와대 등에 보고하는 게 역할 이라고 주장했다.

275p. 감사원은 김수현이 “상식 밖 지시”, “말도 안되는 지시만 반복”한다고 지적했다. 항공구조사를 선내 진입시켜 승객을 구조해야할 상황에서 90도 이상 기울어진 6천 톤급 배를 배수 작업으로 가라앉지 않게 하라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다. 현장 상황 파악에 실패한 이유는 서해해경청 상황실에서 세월호와 교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수현은 “서해청은 VHF 통신망이 없어서 사고 선박과 교신을 별도로 취한 바가 없”다고 주장했다. 선장 이준석 등이 이미 조타실에서 도주한 오전 10시 1분에야 서해해경청 상황실장 김민철이 뒤늦게 진도VTS를 호출했을 뿐이다.

 

- 최초의 지휘자

275p. 수난구호법 17조에는 “조난 현장에서의 수난구호 활동의 지휘는 지역구조본부의 장 또는 소방서장이 행한다”고 돼있다. 해상 사고에서는 사고 해역을 관할하는 해양경찰서장이 지역구조본부의 장이 된다. 세월호 사고에서는 목포해경서장 김문홍이 최초의 현장지휘자 였다.

276~277p. 2012년 12월 목포해경서장에 취임한 김문홍은 “해난 구조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해난 사고를 처리하는 부서에서 주로 일해왔고 함정 근무도 여러차례 한 전문가였다. 김문홍은 2010년 12월 26일 3009함 함장 시절, 화물선이 뒤집혀 차가운 바다에 떨어져 있던 승조원 15명을 모두 구조했다.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 불린 이 사건으로 김문홍은 국제해상기구로부터 ‘바다의 의인상’을 받았다. (...) 김문홍이 3009함 조타실로 올라간 시각은 9시 3분이었다. 3009함 부함장 박경채가 “지금 맹골도 근해에서 여객선이 침몰 중”이라고 보고했다. (...) 김문홍은 사고 현장으로 직접 이동해 세월호의 침몰 정도, 승객 대피 여부 등 현장 상황을 확인하고 지휘해야 했다. 123정은 대규모 해상 사고에 대한 구조 활동을 현장에서 지휘해본 경험이 없었다. “해난 구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김문홍의 현장지휘가 절실했다. 많은 승객이 선내에 남아 탈출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퇴선 방송을 하고 선내로 진입해 구조하도록 지시해야 했다. 때마침 헬기 512호와 함께 3009함에 머무르던 김문홍은 법적으로도 세월호 사고의 현장지휘자였지만, 당시 현장에 가서 구조 활동을 통솔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유일한 지휘관이었다.

280~281p. 2015년 12월 15일, 세월호 특조위 청문회에 나온 김문홍은 전혀 다른 태도를 보였다. 3009함에서 채널 67번으로 세월호와 교신하지 않았고, 세월호와 교신하라고 목포해경 상황실과 123정에 지시하지도 않았다는 추궁에 김문홍은 “신이 아닌 이상 어떻게 이것을 다 챙”기느냐며 “한 일이 있는데, 그 중에 없는 것만 골라서 말하”느냐고 화를 냈다. 그는 세월호와 직접 교신하기 위해 “목포해경 상황실이 있고 구조 세력이 있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목포해경 “상황실을 지휘해야하는 책임”이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다음과 같이 항변했다.

 

 “어떤 말씀을 듣고 싶습니까? 제가 아무것도 안하고 뭐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까? 아니면 통신기도 챙기지 못한 무능한 서장이구나, 그 소리를 듣고 싶습니까? 아니면 왜 확인을 안했냐 그 말씀입니까? 말씀해주십시오.”

 

283p. 

김문홍 : 워낙 인명구조에 급박한 상황이라 그 다음은 정장이 다 알아서 판단해서 잘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감사원 : 잘 알아서 했을 것으로 믿는 것은 상당히 위험합니다. 잘 알아서 하는지 지켜보다가 잘못한 점이 있으면 지시를 내려 바로잡는 것이 지휘관의 임무아닙니까. 알아서 잘 할것이라고 지휘를 하지 않는다면 뭐하러 지휘관이 필요합니까.

김문홍 : 123정장이 경험도 있고 적극적인 성격이라 신뢰를 하였던 탓에 믿었던 것이라는 의미이지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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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경 지휘부의 항변에는 비상사태에서 지휘부가 무슨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이 없다. 현장에서 해야 할 일을 모두 알아서 잘한다면 지휘부는 없어도 된다. 현장에서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 때 지휘부가 나서서 통솔하지 않는다면 부는 있을 이유가 없다. 지휘부는 왜 존재하는가. 그들에게 높은 지위와 큰 권한을 주는 이유는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