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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 후루이치 노리토시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1차 세미나를 끝내고 (2016.02.15.월)

 

젊은이,를 이야기하지 않는 젊은이에 대해 생각했다. 나 자신은 ‘젊은’존재 임에도 그 ‘젊음’을 논해 본적이 없다. 그렇다면 젊은이가 필요하다는 것은, 젊은이에게 비난이 아닌 격려를 주어야 한다는 것은 다 누가 하는 말인가? 아니, 그보다 더 먼저 젊은이 스스로가 그의 젊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옳은 일인가? 필요한 일인가? 세미나 시작에서, ‘나’스스로에 대해 이야기했다. 몇 달 전 까지만 해도 나에 대해 한 줄의 글도 쓰지 못하던 나였지만, 그날은 왜인지 술술 써졌다. 아마 며칠 전 쓴 자소서 덕이겠지만 그래도 분명 나는 나에 대해 막힘없이 술술 무언가를 써내려가고 있었다. ‘나’가 ‘나’에 대해 말하는 당연한 일에, 왜 이리 많은 생각이 오가는 걸까. 젊음도 마찬가지. 젊은이가 젊은이에 대해 말하는 당연한 일에 왜 그리 많은 물음이 떠오르는 것일까. 물어본 적 없어 그런 것 아닐까, 답해본 적 없어 그런 것 아닐까. 그래서 이 시간이 흥미로워졌다. 당연한 것은 세상에 없다고, 아무것도 믿지 않고 결정하지 않을 거라고 말하던 나에게 그렇다면, 너의 젊음은, 너 자신은 당연하냐는 물음. 그 물음에 대답을 해야 할 의무가 나에겐 분명 있다. 나는 ‘나’로서 살아가야 하므로, 그 ‘나’는 2016년 현재 ‘젊은이’이므로.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3차)를 끝내고.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말할 때, ’일본‘을 모르고는 불가능 하다는 생각이 더 강해졌다. 그리고 우리가 당연히 우리의 것이라고 믿고 있던 많은 것들이 일본으로부터 발생되었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더 큰 무기력을 느꼈다. 하지만 전부터 느끼던 ’다음이 없는‘ 무기력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나는 우리나라 현대사에 대해서 더 공부를 해야겠다는, 일본의 역사에 대해 더 공부를 해야겠다는 그래서 우리(그리고 나)의 것을 확실히 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남에게 배워 온 것을 (실체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그것을) 그대로 배우고, 또 그것을 배우는 멍청한 짓 따위,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청년 담론 세미나로서, 나는 에너지를 가진 세상을 바꾸고 다른 세상을 살아갈 에너지를 가진 청년으로서 무슨 일을 해야 할지 고민하게 만드는 시간이다.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4장)을 읽고.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사회운동은, 그저 마음 둘 곳의 하나라고 말한다. 저자가 이것을 완전히 부정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있지는 않지만 나는 그의 의견에서 어느 정도의 자조적인 어투를 느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사회운동을 바라는 것인가. 같이 이야기해보아야 할 부분이다. 우리나라에 필요한 사회 운동은 무엇인가. 개인을 위해 사는 우리에게 사회 운동이라는 말은 너무나 거대해 보인다. 이 거대한 문제를 거대하지 않은 ‘나의 문제’로 이끌어 내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과연 ‘나’의 문제와 ‘거대한’-국가,환경과 같은- 문제는 성공적으로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