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러분은 설국의 첫 문장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름답거나 그렇지 않거나 혹은 아무런 느낌이 없을 수도 있겠죠. 책의 첫 문장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과 그 이유 그리고 여러분에게 있어서 좋은 문장이란 어떤 문장인지도 함께 말해주세요.
<설국>이라는 책을 알게 된 건 분명 ‘첫 문장’ 때문이었다. 이 책이 워낙 문장 하나하나에서 오는 묘사가 유명한 책이라 (물론 일본 최초 노벨 문학상 수상작이라는 명예를 포함해) 첫 문장에 더 큰 의미가 부여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니, 꼭 이 책의 ‘첫 문장’이라서 아름답고 중요한 것이라기보다는, 설국의 많은 문장들이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겠다. 어쩌면, <설국>의 첫 문장에 내가 별 다른 감흥을 느끼지 않아서 일지도 모른다. 나는 글을 쓸 때, 누구보다도 첫 문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글을 다 쓰고 나서도 더 임팩트 있는 첫 문장을 만들기 위해 고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 그런 수정작업을 거친다. 내가 ‘매력 있는 첫 문장 만들기’에 골몰하게 된 건 아마도 고등학교 3학년 입시 준비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때 나에 대해 참 많은 글들을 썼는데, 나에게 제일 중요한 건 심사관들이 내 첫 문장을 읽고 계속 읽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 이후로 그 습관이 굳어져서 일부러라도 재밌고 매력 있는 첫 문장을 넣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첫 문장을 재밌게 만드는 게 글 쓰는 하나의 재미이기도 하고. 그런데 내가 쓰는 글 말고, 내가 읽는 글에서 기억에 남는 첫 문장이 있던가 생각해보면, 그렇게 많이 떠오르진 않는다. 내가 쓰는 첫 문장에 골몰하는 것만큼, 내가 읽는 첫 문장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그냥 하나 떠오르는 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테레자가 들고다니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의 첫 문장이다.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이 정도는 되어야 대가의 첫 문장 아닐까. 아마 톨스토이도 몇 번이고 이 첫 문장을 고쳤을 거다.
내가 ‘문학적으로’ 좋다고 생각하는 문장들은 아무래도 묘사와 표현이 새롭다고 느끼는 문장들이다. 그리고 문학을 제외한 책들을 읽을 때는 보통 나에게 ‘생각’을 하게 해주는 문장들을 좋다고 느끼는 것 같다. 그래서 아래 내가 좋아하는 (문학에서의) 몇 개의 문장들을 덧붙이며 답변을 마무리하도록 하겠다.
내가 좋아하는 문장들
[2]
여러분은 설국이 지닌 형식을 어떻게 받아들이셨나요? 소설을 읽는 동안 형식이 여러분에게 끼친 영향은 무엇이었나요? 단순히 형식에 대한 이야기를 넘어서 책 전체의 감상에 대한 질문이라고 해도 좋겠네요.
갑자기 1년이 훅 하고 지나가고, 장면이 훅 하고 바뀌어서 내가 집중을 안했나 싶었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뒤에 해설을 보니 원래 이 책이 하나의 완성된 서사로 짜여진 것이 아니라고 되어있기에 내가 집중을 안한게 아니었구나 싶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와 같은 형식이 그렇게 불편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냥 그렇구나 싶었고, 하나 하나의 묘사를 보는 즐거움이 컸다. 처음에는 자꾸 서사를 내 멋대로 판단하면서 괴로움을 느꼈지만 중반 이후 요코를 바라보는 시마무라의 서술에 흥미로움을 느끼고 재밌게 읽었던 것 같다. 내가 좋다고 여긴 문장들 역시, 대부분 시마무라가 요코를 보는 모습에서 등장했다. ‘들리지도 않는 먼 배에 탄 사람을 부르는 양, 슬프도록 아름다운 목소리였다.’와 같은 문장들이 참 좋았다. 요코의 눈빛, 목소리. 사실 요코와 시마무라가 나눈 대화의 장면은 몇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마무라가 요코를 관찰하는 묘사 때문에 요코와 시마무라 사이의 대화가 더 등장하길 바랐다. 고마코가 부리는 애교와, 정신빠진 모습이 별로 맘에 안들기도 했고.
[3]
그렇다면 우리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읽은 걸까요? 아니면 번역가가 편집, 재생산한 『설국』을 읽은 걸까요? 과연 이 두 가지를 같다고 말할 수 있을지, 같다면 어떻게 같고 다르다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생각해 주세요.
우리나라에서 번역 논쟁은 아주 끝없이 이어져왔다. 최근에도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에 대한 번역논쟁으로 우리나라의 오역의 역사에 대해 다루는 기사들이 나오기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자세한 내용은 http://www.huffingtonpost.kr/2014/03/29/story_n_5053660.html 참고.) 나는 중학생 때부터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 라는 책을 참 좋아했다. 파울로 코엘료는 브라질 사람이라서 포르투칼어로 글을 쓴다. 우리나라에는 포르투칼어 번역자가 없어, 지금 나와있는 연금술사의 번역본은 중역판이다. 그니까 포르투칼어를 영어로 번역해놓은 것을 다시 우리나라말로 번역해놓은 책이다. 나는 이 사실을 알고 난 뒤 영어판 연금술사를 구해서 내 나름대로 영어로 읽어보려 노력했던 기억이 있다. 제일 좋아하는 책이었으니, 원문으로는 아니더라도 중역판 보다는 가깝게 그 책에 다가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다 읽고 나서 서투른 나의 번역 실력보다는, 전문가의 중역판이 훨씬 나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나라에 태어난 죄로 답답한 번역을 계속 거쳐야 한다는 현실을 인정했던 것 같다. 그러니 나에게 있어 번역판을 읽을땐, 그 번역자를 믿는 방법이 가장 확실하다. 정말 이해가 가지 않고 궁금하다면 원문을 구해, 하나하나 공부해가며 읽어보면 된다. (내가 연금술사를 읽었던 것처럼) 하지만 모든 책을 그렇게 읽어보기란 힘들고 (지금 당장 중간고사를 위해 operating system 원서 읽는 것도 하기 싫어서 미뤄두고 있는데...) 솔직히, 원문을 읽는다고 해서 원작자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 논쟁으로 예를 들어 이야기해보자면, 이 번역논쟁에서 가장 논쟁점이 되는 부분은 뫼르소의 총격이 ‘태양’에 의한 것인가 ‘정당방위’인가 하는 것이다. 기존의 김화영 번역판에서는 태양에 의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고, 논란에 불을 당긴 이정서 번역판에서는 아랍인의 칼에 빛이 반사되어 쏜 정당방위로 묘사하고 있다. 솔직히 말해 이 둘의 차이가 뭐가 그리 큰지 모르겠다. 이후 뫼르소는 직접 자기가 태양 때문에 쏜 것이라고 말하고, 그에게 아랍인의 존재는 그 순간 빛나는 태양 아래 반짝이는 검을 지닌 무언가 그 이상 그 이하의 의미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 순간 그는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던 날과 똑같은 태양을 보았다. 그날처럼 그는 머리가 아팠고 한 발짝 자리를 옮김으로써 태양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태양을 벗어나지 못했고 오히려 그 태양은 아랍인의 검을 비추었다. ‘반짝.’ 그 뜨거운 검은 뫼르소의 고통에 사로잡힌 눈을 후볐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게는 마치 하늘이 통째로 열리면서 비오듯 불을 내리붓는 것 같았다. 나의 존재 전체가 송두리째 팽팽하게 긴장했다.(87p) 어머니의 장례식에서도 마리와의 관계에서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순간을 그 때 느낀 것이다. 순간을 사는 뫼르소에게 그것은 모든 선택에서 가장 큰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흔들리게 만드는 그 어떤 것. 그것이 비록 재판장이 보기에, 검사가 보기에 터무니없는 이유라 할지라도 말이다. 결국 그가 아랍인을 죽인 건 ‘태양’. 그 반짝임, 머리아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물론 이 모든 이야기는 김화영 번역만을 읽은 나의 해석일 뿐이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건, 김화영 번역이 맞고 이정서 번역이 틀리고, 정당방위고 뭐고 이런 문제가 아니라 번역이 어찌되었든 그 맥락 속에서 독자 스스로 무언가를 판단할 수 있다면 상관없다는 것이다. 내 해석이 틀렸을 수도 있다. 까뮈는 정당방위로 뫼르소의 행동을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옳지 않은 독서인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번역에 대한 이러저러한 논쟁들은 적어도 내가 책을 읽는데 있어서 별 영향이 없다. 그러니, 나는 번역가가 편집, 재생산한 『설국』을 읽었지만, 그것은 결국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읽은 것과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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